정말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상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상이 됐습니다. ‘4차 산업혁명’,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미래학자나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닌, 일상 속에서 구현되는 현실입니다. <터미네이터>, <아이, 로봇> 등을 보며 상상했던 인공지능(AI) 또한 여러 분야에 활용되며 점차 고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AI 하면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봇이 결코 인간을 따를 수 없는 영역’으로 손꼽았던 바둑대결에서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진화한 AI 앞에 손들고 말았습니다. 이제 세계랭킹 1위(커제 아니고요, 우리나라의 신진서 9단입니다! 2000년생이네요~)도 어쩌지 못하고 ‘바둑에서 AI의 적은 AI뿐’인 시대가 됐지요. 바둑판에 담긴 5천 년 인간 역사를 AI에게 내준 것 같은 느낌입니다.
<고스트 바둑왕>. 제가 애지중지하는 만화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은 억울한 누명으로 자결한 헤이안 시대 바둑 최고수 후지와라노 사이가 중학생 히카루에게 빙의, 바둑의 세계를 밟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신의 한 수’를 찾는 사이, 도우야 아키라를 쫓으려는 히카루 모두 절실함을 담아 바둑에 매진합니다. 둘뿐만 아니라 작품 속 여러 캐릭터들의 바둑에 대한 애정과 끊임없는 노력이 23권 곳곳에 나타납니다. 감동이 전해져 올 정도입니다. ‘지금이라도 바둑을 배워야 하나?’ 생각들만큼 바둑을 참 매력 있게 잘 그린 것 같습니다.
중반부를 조금 지나 사이가 히카루의 몸 속에 들어갔던 이유를 깨닫고 떠나면서(원혼이 사라지면서) 살짝 김이 빠지는 느낌도 듭니다만, 사이의 흔적이 담긴 바둑을 통해 사이에게 닿고자 하는 스토리로 이어지면서 다시금 활력이 살아납니다.
* <고스트 바둑왕>을 본 게 대학 복학생 시절이었습니다. 고스트가 사라졌으니 ‘이렇게 끝나나?’ 싶었는데 계속 이어지더라고요. 우리나라에 들여오면서 제목을 잘못 달았던 탓이랍니다! 약 10년쯤 지난 2010년 일본 원작 제목인 <히카루의 바둑>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웰메이드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만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히카루가 연패를 함며 마무리에 이르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왠지 현실적인 느낌도 들고 미래를 향한 열린 결말 같기도 하기도 해서 여운이 남네요(작가는 ‘일본 바둑, 이대로는 한국과 중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경각심을 주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 우리나라는 바둑 강국입니다!^^).
사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결과를 접했을 때 잠깐 이 만화가 떠올랐습니다. ‘사이 같은 전설의 고수가 알파고를 상대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었죠. 만화책에 언급된 대로 머나먼 과거와 머나먼 미래를 잇기 위해 바둑을 두는 게 사람인데, 기계에 무릎 꿇었다는 게 많이 씁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고스트 바둑왕> 속 사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거의 내력을 기반으로 하카루와 함께함으로써 더욱 강해진 사이. 그는 역사 속 수많은 기보를 축적한 것은 물론 지금도 승부를 이어가며 진화를 거듭하는, 빅데이터와 반복 학습이 만들어낸 AI를 대변한다고 여기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결국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히카루를 통해 사이가 재현된 것처럼,AI 역시 사람을 통해서만 그 가치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이 연사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맛 아니겠습니까?^^
만화 <고스트 바둑왕>. 제가 갖고 있는 건 23권짜리인데, 2010년 새롭게 나온 <히카루의 바둑>은 20권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