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마무리하며 이백여 권의 서적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여동생 집 정리로 시작했던 작업이 아버지 댁에 오랫동안 놓아두었던 서적으로, 저희 집 책장에 잠들어 있던 책들까지로 확대됐습니다.
오래전에 읽고 덮어뒀던 책만큼, ‘꼭 읽어야지’ 샀다가 펼치지 않은 것들도 많습니다. 밑줄 가득하고 접힌 부분이 많은 책을 보면 그 책을 읽었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특히 누군가의 메시지가 적혀있거나, 책 속에서 편지나 사진이 ‘툭’ 떨어지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읽어야 할 ‘마음의 때’를 놓친 책의 경우엔 책값 이상의 아쉬운 마음이 생깁니다.
막상 처분하려니 착잡합니다. 왠지 책과 관련된 추억까지 사라지는 듯합니다. ‘이 책은 언젠가 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수차례 빼었다 넣기를 반복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정말 괜찮은 책들인데 중고서점에서 매겨주는 가격은 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나마 매장에서 사겠다고 한 마흔 권 정도는 권당 1천원 가량에 팔았습니다. 그 외는 50원/kg의 가격에, 중고책이 아닌 고물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참 좋은 책들인 건 알겠는데 여기도 책이 넘쳐난다”며 “나머지 것들은 다 합쳐서 5천원 쳐주겠다”는 매장 분의 말이 이해는 가면서도 서글퍼지더군요. 차에 다시 싣고 돌아왔습니다.
문득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중고폰 ATM이 생각났습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투명하고 합리적인 가격을 제안하지만, 고객이 생각하는 금액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처음 구매했을 때의 가격, 폰에 얽힌 추억을 생각하면 제안가보다는 훨씬 높은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샀던 시절의 가격, 읽던 순간 느낀 가치가 마음에 있다 보니 지금 중고책 시세는 그렇지 않은 걸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하는 법입니다. 기존 책들을 치우지 않으면 새 책을 꽂을 공간도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고요. 아마도 이번 주 재택근무를 마친 어느 날 제 차는 또 다른 중고서점으로 이동할 테고, 조금 비워진 책장은 곧 새로운 책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시세에 맞는 새로운 책처럼 이 시대에 적합한 지식과 교양이 제 머릿속을 채우길 기대합니다. 여러분들도 기분좋은 독서로 마음 풍성해지는 가을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