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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Aug 06. 2021

서문 : 다시, 추억에 빠져들기 전에

마흔다섯 살이 됐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하늘의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공자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때와는 다른 사회를 탓해보기도 합니다. 엄청 빠르게 변해가서 삶을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어제의 정의가 불공정으로, 그때의 배려는 편견으로 바뀌었습니다. 불혹을 넘긴 이의 통찰력 담긴 조언은 꼰대 아저씨가 하는 잔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마흔다섯 먹은 제 느낌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쉰다섯의 임원분도, 신혼살림을 시작한 삼십대 초반 후배도, 이제 막 회사에 들어온 신입사원도 모두 ‘내가 낀 세대’지요. 끼어있는 자들의 세계! 지금은 사물과 하늘의 원리보다는 눈치를 살피는 게 훨씬 중요한 시대입니다.


빨라지고, 많아지고, 다양해진 세상 속에서 기술과 트렌드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걸 혼자 감당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산업화 시대 협력이 ‘손이 부족해서’ 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내 손으로는 못해서’ 의지하는 협력입니다. 때문에 나이나 직책의 우위를 이용해 타인을 수족처럼 부려선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했으니까’만 떠올리고 밀어붙이는 성향이라면 ‘라떼 꼰대’임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라떼를 참 좋아하는 데다 선생 역할을 즐기는 문제아입니다. 사십대가 되면서 이것저것 잡기에 자아도취 내공이 더해져 상태가 심각해졌습니다. 주변에 마음 넒은 분들이 많다보니 이 시대 필수역량인 눈치 기술도 잃고 말만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총체적 난국, 아닌 난인입니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상대의 ‘틀리지 않고 다른’ 의견을 경청하려 노력합니다. ‘교정’ 능력은 업무적으로 자료를 다룰 때만 고도화하고, 변하는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하고 소통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잘하지는 못해도 더 나빠지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또 다른 소통이 이뤄집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서 말입니다. 몇 년 전까진 밤 늦게나 주말에 집중됐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새로운 일상이 됐습니다. 특히 재택근무가 많아지면서 최신영화나 베스트셀러 도서뿐만 아닌 옛것을 돌아보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오래전 의미있었던 대상들, 가끔 ‘왜 이걸 좋아했을까’ 싶은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여전히 재미있고 여운이 깊었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랄까요? 그러다 문득 ‘이 추억을 기록으로 남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 음악, 영화, 책 등을 통해 제가 세상과 소통했던 모습을 꺼내오는 것이지요. 라떼와 이때를 연결하면 뭐라도 가치있는 것 하나는 나오지 않겠어요? 별게 없어도 괜찮습니다. 지난 그 시절 함께 했던 이들이 기억해내고, 제가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던 대상을 통해 독자 한 분의 추억이라도 되살아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과거 기억이지만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것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파일보다는 물건이 당겼습니다. 그래서 등려군, 유키 구라모토 등 LP를 해외에서 구입했고요, DVD 플레이어와 디스크들을 다시 구입했습니다. 언젠가 예쁜 쓰레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일단 기분은 좋습니다. 더 마음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반과 영화로 소개하는 작품은 거의 거실 TV 근처의 이 사진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한 가지 염두에 두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저는 기억 그대로의 추억을 적을 테지만, 그게 과거 그 시점의 사실은 아니란 점입니다. 기억은 과거에 생성된 것 그대로가 아닌, 글을 쓰는 시점의 제가 편집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머릿속 다시보기 영상은 정확하지 않고 왜곡됐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엄청 과장하고 미화할지도, 반대로 실제보다 더 비참하게 그려낼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사실과는 다르니 가급적 멋지고 대단했던 저로 기억해낼 참입니다!^^) 과거 얘기지만 지금 시각이 담긴 것임을 감안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얼굴은 저보다 열 살쯤 어려보이지만 실제론 동갑내기인 아내가 있어 참 다행입니다. ‘타자’를 대표해 저를 향해 가감없는 평가를 전하는 것은 물론, ‘우리’로서 추억 속 대상들을 함께 기억하고 대화해주는 그녀로 인해 재택근무하는 나날들이 더욱 즐거워지고 있습니다. 아내 덕분에 향후 제가 제대로 된 책을 펴내는 날이 조금은 더 빨라질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슬슬 음반, 영화, 책과 함께 미혹된 지난날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 2021년 8월, 강원도 평창 별천지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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