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에는 집에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코스트코에 가서 녹차 찹쌀떡 디저트를 사러 갔다. 운전 자체도 아가를 낳고 처음으로 시작했고, 연수를 받으며 여기저기 다니긴 했는데 혼자서 삼십 분 거리 운전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이런 거 줘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별거 아니지만 선생님들 주려고 샀어요. 우리 아가 첫 번째 주 잘 보내게 도와줘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우리 아가의 데이케어 첫 주가 꽤나 무난하고 안전하게 흘러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다. 여러 국적과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 만들어낸 따듯하고 안전한 울타리안에서 우리 한국인 아가는 막내이고, 한 주간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동시에 받은 것이 너무나 느껴졌다. 왼팔엔 아가를 안고 오른팔로는 접힌 유아차를 옮기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차에 타서는 그리웠던 엄마 품에 안긴 아가를 십여분 꼭 안아주었고 아침, 저녁 이외에는 거의 하지 않는 수유를 조금 했다. 엄마 그리웠지? 오늘도 잘 보내줘서 너무 대견해. 말이 안 통해도 아가는 다 알아들을 거라는 믿음으로 아가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궁둥이팡팡도 백만 번 하고 집에 오니 오후가 다 흘러있었다.
이제 갓난아기가 아니라 토들러에 더 가까워진 우리 아가는 돌을 앞두고 있고, 엄마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되었다. 생각보다 이르게 시작하게 된 워킹맘 라이프는 남편과 시부모님의 도움과 지지가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늘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지 현실감이 없었던 워킹맘라이프를 준비하면서 또다시 컴포트존을 벗어나는 일들의 연속이었는데 어찌어찌 다 해내면서 숨 가쁘게 시간이 흘러 오늘이 되었다. 그동안 계약서에 사인하고, 내 비자로 인해 체크해야 할 사항들 때문에 계약서가 수정되기도 하고, 온보딩 서류들을 차근차근 진행하며 이 기관의 컬처와 시스템을 좀 알게 되었고 더욱 확신이 들었다. 나 여기서 꼭 일해야만 해.
사실 8월부터 면접을 보긴 했었지만 제대로 잡헌팅 마켓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아가 재워두고 잠깐씩, 그리고 남편이나 시부모님께 아가 맡기고 잠깐씩 지원서 넣은 것들이 전부였다. 큰 글로벌 SAAS 회사 하나, 호주 정부 소속 기관 하나 (여기선 카운슬이라고 한다) 면접 보면서 엄청 인텐스 하게 면접 준비를 했었는데 두 번째 면접본 곳에서는 직접 전화 걸어서 피드백까지 다 주었다. 박사학위 이상 가지고 리서치 롤을 수행하는... 나랑 전혀 핏이 안 맞는데 면접에 왜 불렀을까... 스러운 롤이어서 태어나서 본 면접 중 가장 말아먹고 왔는데 뭐가 이쁘다고 나한테 전화를 했을까 했는데, 여기는 호주였다. 내가 가진 능력과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는 비즈니스나 마케팅, 그리고 비영리기관 쪽으로 지원하면 아주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너는 너무 많은 잠재력과 좋은 에너지를 가졌다며. 오히려 나를 응원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거는 한국에서는 못해본 경험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두 번째 면접까지 보고 나니 마음이 좀 놓였다. 아... 그냥 이렇게 하나둘씩 지원하다 보면 내게 맞는 잡이 올 거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무엇도 꾸며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내가 해왔던 경험, 지금 가지고 있는 가치관, 앞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성의 세 박자가 모두 맞아야만 하기 때문에 쉽게 아무거나 찾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거니까 조급 해하지 말자, 하던 찰나에 지금의 잡이 떠서 바로 지원서를 썼다. 화려하게 나를 꾸미는 것 말고 진정성 있게 보여주는데 배팅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내가 살아온 삶을 녹였고 그게 먹혔다. 몇 번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도 양파 껍질을 까내듯이 나를 보여주면 되었다. 처음 만나서 할 수 있는 이야기부터 조금 친해지고 알아갈 때가 돼서야 할 수 있는 이야기들까지 - 빛나고 도드러지는 성공과 강점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지 않고 그간 살아온 삶에서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약점까지도 이야기하고 나왔더니 속이 후련했다. 당연히 되면 좋겠지만 안 돼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만큼. 항상 내 언어가 부족하다고 느껴왔는데 이번 면접들을 거치면서 더더욱 깨달았다. 내 생각의 중심, 내가 가진 에너지, 경험으로 배운 것들 같은 것들은 본질이며 세컨드 랭귀지나 악센트 같은 건 비본질이었다.
그리고 면접은 잡을 찾기 위해서 보는 거지만, 그보다는 나를 돌아보고 정의 내리게 된다는 순기능이 있다.
서른에 이곳에 넘어와 프리워커로 살며 블루베리를 따다가 다소 급작스럽게 공부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족을 이루면서 엄마가 되었고 홍 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기도 했는데 이 몇 년간 나는 삶에서 만난 이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녹여내었다. 때로는 힘들게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아름답게 소화해 낸 이 사건들로서 나를 'Resiliency & Creativity'라는 본질로서 아우르며 정의하게 되었다.
호주에 와서 풀타임 잡이 없는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휘청이면서도 했던 발론티어는 지금 내가 걷고자 하는 국제개발협력 분야를 만나도록 문을 열어주었고, 엄마가 되어서도 자유시간을 만들어했던 발론티어는 결과적으로 일하는 여성으로서 내가 사랑했던 아이덴티티를 심폐소생해 주었다. 다니던 스타트업에서 핏이 맞지 않는 업무를 하며 좌절하면서도 스스로를 갈아 넣었던 경험 또한 나를 설명하는 거고 그게 나이다 보니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더 알 것 같다. 이제 나에 대해 한 50%는 알겠는데... 일하는 나, 성장하는 나는 적당한 긴장과 자극이 있는 삶에서 나는 컴포트존을 넘으며 성장해 왔고 스스로 그런 환경을 무의식 중으로도 찾으며 살아왔던 것 같다. 엄마로서의 나는 지난 1년간 안정적이고 편한 걸 찾아왔는데 그러면서도 또 자극과 긴장을 애써 피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힘들지만 어떻게든 그걸 넘으면 성장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머지는 앞으로의 삶에서 육아와 일에 치이며 - 치이면 치일수록 발동되는 악바리 근성을 통해서 발견해 나가는 걸로, 내일부터 파이팅 해보는 걸로!!
우리 아가도 나도 1년간 수고 많았다... 앞으로 갈길이 많이 남았을 텐데 신생아 때를 떠올리면 왜 이렇게 1년밖에 안 됐는데 옛날 같고 아가가 한 살 되니까 다 키운 것 같고 그렇지? 얼마전에 우리가 아가를 낳고 기르던 집앞을 지나가는데 그 시절이 전부 기억나진 않지만, 아가랑 하루종일 꼭 붙어서 생활하던 그 시절이 조금 기억나면서 너무 특별하고 아련했어. 남편과 아가 데리고 처음으로 셋이 되어 집에 들어서던 날, 같이 거실에서 낮잠자고 처음으로 셋이 산책했던 공원, 바시넷이 탑재된 무거운 유아차를 끌고 매일같이 잠이 부족해 몽롱한 상태로 걷던 동네, 그시절 함께 육아의 고단함을 나눠주던 친구와 동료 맘들, 그리고 아버님께 아가 맡기고 어머님께 운전 연수받던 나날들... 지나고 보니 너무 몽글몽글 따듯한 기억 뿐이다.
힘들었던 건 정말 기억이 안 나... 잠 못잤던거만 빼고는 다 좋았던 것 같은데. 인간은 역시 망각의 동물인가, 아니면 Mum's brain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