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 "음복"(강화길 작가)을 읽고 나서
여성가족에게 미안하다. 동시에 섬뜩한 기시감이 든다. 남일 같지 않아서.
우리 가족은 60년생 엄마와 아빠, 90년생의 첫째 둘째 셋째이다. 가족 중 3명이 여성이다. 가족 중 3명이 가사노동에 종사한다. 나머지 2명은 아무런 대가 없이 승계받은 권력을 통해 가사노동을 면제했다. 당연하듯이 여성가족이 가사노동에 종사하고 나머지 2명은 남성 가족이다. 당연한 권력이 이 상황을 만들었고, 만들고, 만들어나간다.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는 그래 왔다. 당연하듯이.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세상은 가족이다. 가족에서 배운 관습과 행동양식을 배우고 성장하여 더 큰 세상으로 나간다. 그 범위를 벗어나 새로운 관습과 행동양식을 체득하는 작업은 힘들어서 쉽게 포기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듯이) 흔히 살아오던 대로 살아가는 게 평범한 수준이고 가끔 인생을 변화시켜 성공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영웅을 바라보듯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먼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나의 이야기로 들리나 보다.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을 대학교 수업에서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한 예시는 아니지만) 이 소설을 읽고 두루뭉술하게나마 인지하고 있던 "가족 내 불평등 권력관계"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명확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언어 즉 소설을 통해 생각이 조금 더 명료해졌다. 생각이 명료해졌으면 다음은 행동이 있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평범한 공감으로 끝난다면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의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감을 넘어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숨은 의도를 생각해본다. 그래서 여성에게 독박을 "강권"하는 가족권력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는 듯이 공평한 가사노동 분담의 미래"가 "영웅을 바라보는 듯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의 평범한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실천은 어렵지만 행동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조부모"세대에서 "부모"세대를 거쳐 "자녀"세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권력은 오로지 남성의 것이다. 대다수 일반의 삶에 충격적인 사건이라든가, 주인공의 일탈이라든가, 특별한 깨우침은 없다. 항상 그래 왔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가사노동의 불공평한 권력 비대칭이라 할 지라도, 그 현상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오롯이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현실일지라도, 남성은 눈치가 있는 듯 없는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권력의 편이기에 마음 편하게 살지라도, 태어날 때부터 여성이라서 당연한 것인 줄 알고 그러래서 그러는 게 편해서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눈치 보고 신경 쓰고 걱정하며 숨 막히게 살지라도, 항상 그래 왔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까지? 변화는 어렵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남아선호 사상은 2020 한국 사회에 무엇을 남겼을까? 남성 자신이 그저 옳은 줄 알고 마음대로 해도 부모가 적당히 눈치껏 에둘러 보살펴주니 합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은 자신감을 얻어버렸다. 여성은 "부모"세대처럼 아들을 위해 대학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지 않더라도(물론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남자 형제를 위해 양보하고 뒤로 밀려나고 우선순위에서 벗어나는 역겨운 경험을 매 순간 경험하며 결국 스스로 앞가림을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생존 본능을 체득했다. 뭣도 없지만 부모님이 뒷바라지해주는 남성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으면서 다시금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반면 한 발짝 뒤에 밀려난 여성은 가족의 불공평한 권력구조에서 본인이 마음 편히 들어갈 수 있는 품은 같은 여성인 엄마밖에 없다는 현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현실에 빠르게 적응하려 한다. 평생을 치열하게 분투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반대에 서있는 남성은 아무런 고생과 대가 없이 그러한 권한, 권력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고작 남자라는 이유로.
세상이 호락호락한 이유는 남성에게만 성립하는 말이다. 여성에게 세상이 호락호락한 이유는 없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은 남성에게 관대하고 남성을 높이 여기고 남성에 의해 돌아간다. 남성이 고작 남성이라는 이유로 인해 세상은 그들에게 호락호락하게 군다. 여성은 남성이 아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왔다. 남성은 모를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어떤 세상이 또 존재하는지 모를 것이다. 남성이 남성이라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는 이럴 것이다. 당연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