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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펜 Feb 17. 2018

내가 '타투'를 하는 이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1. ‘소설가’가 쓴 ‘달리기’에 대한 책이라면


하루키의 에세이는 처음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긴 했지만, 말 그대로 에세이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글을 엮어낸 책이었고, 개인적으로는 그저 그랬었기에, 그냥 이 책을 내가 접한 하루키의 첫 에세이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난 이미 이 책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70~80% 확신했다.


첫 번째로 나는 ‘에세이’ 장르를 좋아한다. 에세이는 누군가의 생각이나 경험 그리고 인생관이 가장 꾸밈없고 솔직하게 담겨 있다. 내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혹은 앞으로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할 인생 이야기와 생각들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굉장한 일이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굉장해진다.


두 번째로 제목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하루키의 ‘달리기’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특정 대상에 대해 글을 쓰고 책으로 낼 정도라면, 그 대상에 대한 그의 엄청난 애정과 개인적인 의미가 담겨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마라토너나 육상선수가 쓴 ‘달리기’에 대한 책이 아니라, ‘소설가’가 쓴 ‘달리기’에 대한 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소재가 ‘달리기’라는 점도 한몫한다. 많은 사람들이 별 의미를 갖지 않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이지만, 거기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하나의 의식처럼 행하는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다. 거기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을 것이고, 그 이야기들은 내가 놓쳐버린 수많은 일상적인 것들이 갖고 있는 의미들을 되새김질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2. 하루키가 ‘달리기’를 하는 이유


하루키는 이기고 지는 승부에 집착하지 않아서 달린다.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가기 때문에 달린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고 극복해가기 위해 달린다.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되고,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기에 달린다.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달리고, 달려왔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이기고 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중략)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하게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나는 매일매일 달리면서 또는 마라톤 경기를 거듭하면서 목표 달성의 기준치를 조금씩 높여가며 그것을 달성하는 데 따라 나 자신의 향상을 도모해 나갔다. 적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왔다. 나는 물론 대단한 마라톤 주자는 아니다. 주자로서는 극히 평범한 그런 수준이다. 그러나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천성적으로 ‘고독’한 사람이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이 타인을 바라보는 형태로 혼자임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라면, ‘고독’은 스스로를 타인으로부터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고독한 인간인 하루키에게 ‘달리기’란 그의 내면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끊임없는 ‘담금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수 차례 반복하는 담금질로 쇠가 단단해지는 것처럼, 그는 매일 아침 수십km를 달리며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시키며 단단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달리기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이야기의 흐름은 단 ‘한 가지’로 관통한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자기 자신이 팀 플레이에 적합하지 않고, 승부보다는 내적 성장에 더 관심이 간다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소설가나 장거리 러너로서의 동기와 기준도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이겨내야 할 상대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포니테일 머리를 휘날리며 그를 추월해가는 하버드 여학생들을 바라보며 독백하는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당시의 내 다리는 지금 그녀들의 다리만큼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녀들은 어쨌든 천하의 하버드 대학의 반짝반짝 빛나는 새내기들이니까.
그러나 그녀들의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멋있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확실하게 이어져가는 것이로구나, 하고 소박하게 실감한다. 그것은 결국 인류 대대로 내려오는 전달 사항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에게 뒤에서부터 추월을 당해도 별로 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의 인생 동안에도 수많은 속도가 그의 주변을 맴돌았을 것이다. 때로는 추월하고 때로는 추월당했을 것이다. (그는 추월당하는 것(=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수많은 페이스를 바라보며 그것들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자기 내면에 집중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페이스와 시간성을 알았던 것이다. 그가 단거리나 중거리 러너가 아닌 장거리 러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느 방향과 어느 속도로 달려야 하는 지를 명확히 알았던 것이다.


엊그제 평창올림픽 1만m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 중계를 지켜봤다. 400m 코스를 25바퀴 돌아 결승선을 통과해야 끝나는 장거리 경기였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이승훈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는데 10바퀴가 남은 시점까지의 기록이 선두의 기록과 10초 이상이 차이가 났다. 댓글을 봤는데, ‘벌써 10초나 차이 나면 글렀다. 희망이 없다.’라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도 ‘선두권 진입은 좀 힘들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남은 바퀴가 1바퀴씩 줄어들 때마다, 그와 선두와의 차이가 1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1만m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국 당시 1위 기록보다 3초 이상 빨리 결승선을 통과했고 전체 4위를 기록했다. 소름 돋는 장면이었다.


그도 레이스를 하면서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선두와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10초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만약 그때 그가 조바심을 내서 무리하게 일찍 속도를 냈으면 사람들의 예상처럼 무너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본인이 후반 스퍼트에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본인의 특성과 페이스를 알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준비한 대로 달렸기 때문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좋은 기록을 냈던 것이다.


나 자신을 아는 것. 내가 단거리 러너인지, 중거리 러너인지, 장거리 러너인지 아는 것. 내가 초반에 강한지 후반에 강한지 아는 것. 혹은 내가 달리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 즉, 끊임없이 반복하는 담금질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 페이스대로 달려가는 것. 이것이 하루키가 말하는 달리기이자, 소설을 쓰는 방법이자,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을까.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3. 내가 ‘타투’를 하는 이유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해봤다. 나는 나를 이해하고 담금질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달리기는 아니었다.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하루키만큼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오히려 10km 마라톤에서 다리를 다친 이후로 좋아하는 축구를 못하게 되어 지금은 마라톤을 증오한다..) 내게는 ‘독서’와 ‘타투’가 담금질의 수단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독서’는 최근에 생긴 습관이다. 책을 읽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많은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이렇게 많은 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하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전에 처음으로 나를 이해하고,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했던 것은 바로 ‘타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처음 타투를 했던 것은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역한 직후인 2013년이었다. 그때 당시, 나의 정신적, 심리적 상태는 최악이었다. 군생활로 인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산산조각 난 상태였고, 거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겹쳐있었다. 강박증은 심해질 대로 심해진 상태였고, 심리검사 결과가 이상하다고 학교에서 재상담받기도 했었다. 어찌할 줄을 몰랐고 계속 수렁에 빠져있었다. 물론 시간이 약이라고, 사회에 돌아와 일상을 되찾으면서 점차 괜찮아졌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똑같이 버티고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수렁에서 빠져나올 때, 큰 힘이 되었던 것들을 내 몸에 새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지금은 내 몸 곳곳에 제법 많은 글귀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당시의 순간을 잊지 않고 힘들 때 잘 이겨내자는 목적이었는데, 이후에는 점차 ‘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의미 있는 것들을 새기기 시작했다. 나의 편협함 때문에 놓쳐왔던 것들, 내가 ‘나’ 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는 것들, 반대로 붙잡아야 하는 것들. 때로는 글귀로, 때로는 그림으로 새겨 넣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이 사실들을 알고 있고 후회하지 않냐고 물어본다. 아직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물론 아직은 폐쇄적인 한국 사회를 감안하여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 곳들에만 했다. 그리고 이미 너무 오래되어, 내가 타투를 했다는 사실을 까먹기도 한다. 다만, 내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 다시 깊은 수렁으로 빠지려고 할 때, 그리고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때, 내 몸에 새긴 이 모든 것들이 다시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게 된다. 그럼 어쩔 수가 없다. 지켜내야지. ‘버티자’, ‘이렇게 살아가자’, ‘보다 나은 내가 되자’고 새긴 것들인데, 지켜내야지 다른 방도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고통을 참으면서 새겨낸 의미가 없어지게 되니까 말이다.


앞으로도 내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고, 글귀나 그림이 있다면 계속 몸에 새길 생각이다. 이렇게라도 ‘나’라는 인간을 이해하고 바라는 인간상에 조금이라도 근접할 수만 있다면, 내 몸에 바늘로 글씨를 새기는 누군가는 이해 못 할 행위가 나를 좀 더 단단히 만들 수 있다면, 어쩌면 내 몸을 빼곡히 채울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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