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펜 Oct 13. 2020

나를 지키는 일상

그것은 하나의 작은 섬을 만드는 일과 같았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증오했던 적이 있다. 나름의 가치관을 하나 둘 품어갈 때마다, 이해할 수 없고 눈에 밟히는 것들 투성이었다. '사람보다 돈, 성과보다 정치질, 끊임없는 비교'가 만연한 한국 사회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욕망으로 빚어진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들이쉬는 호흡마다 바이러스가 온몸으로 침투되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 쉬운 게 남 탓이라고, 이런 세상을 만들어 낸 부모 세대를 원망했고, '원래 그랬으니까' 아무런 저항 없이 살아가는 같은 세대도 원망했다. 하지만 타인에게 화살을 돌리는 일은 그리 생산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인류애만 바닥을 칠 뿐.. 스스로를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고, 이내 '전체를 바꿀 순 없어도 나를 둘러싼 작은 세상, 일상만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내 일상을 구성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나를 갉아먹는 유해한 것들을 걷어내고, 무해한 것들로만 일상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섬을 만드는 일과 같았다.


1. 4전 5기, 나와 맞는 직장 찾아내기


나와 맞는 '일터'를 찾아내는 것은 섬의 기초 공사와 같았다. 요즘 'Work and Life' 즉, '워라밸'이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내 가치관으로는 'Work in Life', 결국 일도 일상(인생)의 일부라는 말이 맞았다. 직장은 내 일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이 직장에서의 시간들을 내 삶과 분리하여 마냥 '버텨야 하는 시간'으로 내버려 두기는 싫었다. 그래서 난 스물일곱에 이르기 까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네 번의 퇴사를 했고, 서른의 나이에 한 번 더 이직을 했다.


처음엔 회사라는 기득권 집단으로부터 조롱당하고, 배신당하고, 이용당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의 부정적인 면에만 매몰되지 않다. 체득한 교훈들을 밑거름 삼아 좋은 회사와 나쁜 회사를 비교, 판단하는 능력으로 길러 내었다. 그렇게 난 같이 일할 사람을 살피고, 조직 문화를 판단하고, 불합리함에 굴복하지 않으며 여러 회사를 경험했다. 그 과정 속에서 점점 더 나와 맞는 직장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현실화시켜 나갔다. 다행히 매번 이전보다는 나은 회사로 옮겨갔으며, 마냥 견뎌야 했던 시간들을 점점 주체적으로, 말 그대로 '일'하는 시간들로 바꿔나갔다.


최근에는 특정 직장에 종속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커리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의 회사로 이직했다. 조직이 내게 불합리한 대우를 했을 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한 셈이다. 이 선택 이후 신기한 것은 이전의 회사가 훨씬 크고 안정적이었지만 나 자신은 불안했다면, 지금의 회사는 작고 불안한 스타트업이지만, 나는 훨씬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인생의 주도권을 회사에 넘겨주지 않고 내가 온전히 움켜쥐게 된 덕분일 것이다.


*아래 글은 최근에 이직 당시 썼던 글이다.


곧 다섯 번째 회사로 이직한다.

퇴사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까지의 과정 속에서 매번 ‘나’라는 인간에 대해 면밀히 돌아보게 된다.

나는 참 욕심과 겁이 동시에 많은 사람이다. 이상적인 직장에 대한 기준이 계속 까다로워지고, 한 가지가 충족되면 또 다른 결핍이 눈에 보이고 갈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핍으로 인해 언젠가 내게 닥칠지 모를(혹은 망상에 불과한) 위험에 대해 미리 겁을 먹고 생존을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선다.

이러니 내 마음에 쏙 드는 평생직장을 찾아 정착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회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은 인생이 매몰되는 것은 죽어도 싫다. 그렇기에 나는 이 쉽게 좁힐 수 없는 대척점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지금 단계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객관적인 실력을 쌓는 것]이다. 남의 돈을 받는 이상 ‘을’의 입장을 벗어날 순 없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인 실력이 있다면, 회사가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때 미련 없이 새로운 회사로 떠날 수 있는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 혹은 보다 주요한 위치에 올라 나의 기준과 가치관을 회사에 반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겠다.

내가 이 결론을 말했을 때 누군가가 ‘객관적인 실력’이라는 말 자체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특수 직종을 제외하고 100% 정량화될 수 없는 대부분의 업무 영역, 그리고 회사 생활에서, 실력은 결국 회사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평가받기에 ‘객관적’ 일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난 나에 대한 특정한 (우호적인) ‘주관적 평가’가 장소와 시간, 사람을 불문하고 반복된다면 그것이 곧 나의 ‘객관적인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퍼포먼스를 내고 여러 회사, 여러 동료들에게 ‘일 잘하는 사람,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반복해서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내 ‘객관적인 실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약하자면, 외부 요인에 쉽게 휘둘리거나 구속당하지 않을 수 있는 객관적인 힘을 스스로 키우겠다는 말이다.

‘사람이 별로여서’, ‘회사의 갑질에 분해서’, ‘커리어 패스가 애매해서’, ‘대표의 경영철학이 안 맞아서’ 등 참 많은 이유로 퇴사했다. 하지만 난 아직도 어딘가에는 분명 더 나은 선택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워라밸이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결국 워크도 라이프다. 욕심 많은 내 성격에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좀 더 힘을 내봐야겠다.


지금도 내 두 발을 딛고 있는 일터를 끊임없이 발로 다지고, 들여다보며 상태를 면밀히 체크한다. 기초가 부실하면 내 일상의 모든 것이 연쇄작용처럼 무너질 수 있으며, 그때는 지체 없이 떠나 새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Work In Life, 일도 결국 일상이다.


2. 인간관계를 선택하고 집중하기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말 놔도 되지?"

가만히 앉아 밥 먹고 똥만 싸도 먹는 게 나이인데, 나이로 권위를 내세우며 관계의 우위를 점하려는 인간들이 있다. 나는 상종하지 않는다.


"내가 직장 선배야, 시키는 대로 해"

실력이 아니라, 연차를 들먹이며 일을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자존심을 우선한다거나, 무식한데 신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최악이다. 이런 인간상이 용인되는 조직에는 애초에 몸을 담지 않는다.


''오랜만이야 얘들아, 잘 지냈어? 나 곧 결혼하는데, 밥이나 먹자"

모두가 겉과 속이 다른 연기를 해야 하는 불편한 채팅방에 초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필요한 악습을 무책임하고 무비판적으로 이어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답장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인간관계는 내가 선택한 것들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정해진다. 부모, 선생님, 학교 친구, 직장 동료 등 내 인생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형성된 관계들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내 뜻으로 선택하지 않은 모든 관계들을 숙제처럼 안고 갈 필요는 없다. 서로 맞지 않거나, 함께 있으면 시간낭비라고 느껴지는 관계라면, 과감히 다리를 끊거나, 애초에 놓아주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일상으로 들어오는 다리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리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하다


3.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어디선가 '외로움'이 혼자 있지 못해 괴로운, 부정적인 혼자됨이라면, '고독'이란 내 스스로 선택해 찾은 긍정적인 혼자됨이라는 말을 본 적 있다. 나는 외로움이 많은 인간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못 견뎌하고 어떻게든 약속을 잡아 사람들을 만나며 밖으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웃고 떠들며 내 안의 무언가가 해소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대답 없는 천장을 응시하고 있으면, 원인 모를 내적 허기들이 범람하며 또다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다 타인과의 시간들도 권태로움이 찾아왔고, 무언가 다른 방법을 통해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외부에서 시간을 갖기보다는 나 자신과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수영이나 요가를 하면서 몸을 쓰고, 혼자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글도 썼다.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꿔나갔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조그만 자극에도 사방으로 넘쳐흐르던 위태로운 감정들과 생각들이 적절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물길을 내었다. 흔들리지 않고 지켜나가야 할 생각들 주변엔 튼튼한 댐을 세우고, 흘려보낼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히 방류했다. 어떤 하루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갈 것인지, 어떤 사람들을 만날 것인지 등 나름의 법칙을 세워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외로움이 많은 인간이다. 다만, 과거엔 외로움뿐인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외로움 반, 고독 반 정도를 유지하는 인간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가끔 외로움을 못 이기고 약속들을 잡아 밖으로 돌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감정과 생각의 흐름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마지막. 그래서 지금, 제 일상은요.


아침에 일어나 산뜻한 마음으로 출근길에 나선다. 회사에서는 불필요한 스트레스 없이 일에만 집중하며 내 커리어를 쌓는다. 퇴근길에는 요가 학원에 들려 몸과 마음을 정리한다. 1~2주에 하루 정도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약속을 잡아 수다를 떨거나 독서모임을 간다. 그 이외의 시간은 혼자 영화관에 가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쌓아 올린 나만의 소중한 일상이다.


유해한 것들을 일상에서 원천 봉쇄하다 보니, 내겐 먼 일이 되어버린 일이나 관계에 대한 고충을 주변으로부터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고립된 섬 생활로 면역력이 떨어져 겪게 되는 일종의 부작용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선 '사회성 떨어진다', '정 없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인간, INTJ'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잔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을 빌려 속내를 말하자면, 사실 그런 말들 마저도 좋다. 그것도 꽤나 마음에 든다. 난 이미 이상한 애로,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 좋게 말하면 '오로지 나를 위한 하루를 보내도 괜찮은' 대외적 이미지를 잘 만들었다는 반증이니까.


다만, 사회성이 다소 떨어지고, 정이 없어 보이는 것은, 정작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 없이 사랑하기 위함임을, 나와 내 일상을 지키기 위함임을, 내가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만 알아주면 좋을 것 같다. 나만의 단단한 작은 섬, 그리고 다른 섬으로 이어주는 몇 개의 다리들. 딱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를 지키는 일상, 나만이 작은 섬


매거진의 이전글 도넛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