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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국화 Sep 08. 2022

혼자 여행은 언제나 우당탕탕 1

밤 11시에 선글라스를 쓰고 귀국한 사연


2018년 스페인 여행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5일째 되던 날. 아침 일찍 가우디의 까사 바트요 내부를 구경하고 그라시아 거리를 휘뚜루마뚜루 걷다, 그 거리의 분위기에 취해서 분위기 좋은 타파스 바에 들렸습니다. 타파스는 소량의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서 그저 요기를 하기에도 식사를 하기에도 좋은 음식입니다. 햇살이 좋아서 그리고 기분이 좋은 데다 음식이 맛있으니 낮부터 와인 한 잔을 곁들였습니다. 아, 스페인 와인은 진짜 신의 선물입니다. 어디 가서 마셔도 맛있고 가격도 착합니다. 와인 초보라면 스페인 와인을 적극 추천드리며 와인을 꽤나 안다하는 사람들도 즐겨 마십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라시아 거리의 한 타파스 바에서 와인 한 잔을 하고 기분이 좋은 정도의 취지가 올라서 참 행복하네 했던 그 순간, 읭? 없습니다. 테이블 아래 두었던 제 가방이 없습니다. 조그맣고 가볍지만 수납은 좋아 여행용으로 딱인 저의 백팩이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습니다. 바라고 표현은 했지만 밝고 넓고 직원도 많은 레스토랑이었습니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그럴 리 없는데 현실 부정을 하다 매니저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가방을 여기다 뒀는데 혹시 분실물인 줄 알고 치운 건가요, 아니면 분실물 보관함이 있나요?

매니저는 안타깝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합니다. 잃어버렸나 보네, 한 번 찾아는 볼 게, 아마 못 찾을 거야. 여기서는 소지품 관리를 잘해야 해. 식당 안에서도 말이야.


헐, 이게 무슨. 그렇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18년만 해도 바르셀로나는 번듯한 식당 안에서 가방을 도둑맞아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긴장 풀린 채 낮술까지 하고 헬렐레하고 있었다니 말이죠.


순간 벙쪄서 현실을 부정했습니다.

- 어떡하지?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카메라는 목에 걸고 있었고, 여권과 돈은 호주머니에 넣고 있어서,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아 잃어버린 물품은 휴대폰 충전기, 우산, 사원증, 그리고 안경. 우산과 사원증은 그렇다 쳐도 당장 휴대폰이 꺼지면 구글맵에 의존해 다니던 저는 숙소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거기다 안경 없이는 바로 앞의 사람 얼굴도 못 알아보는걸요.


삼성폰 충전기를 어디서 구하나 낙심하며 길거리 상점에 들렸습니다. 물 한 병을 사며 혹시, 휴대폰 충전기를 판매하냐고 물었더니 넉살 좋아 보이는 주인이 묻습니다.

Samsung or I-phone?

우와, 바르셀로나에서 삼성이라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세계 속의 삼성이라! 그렇게 휴대폰 충전기를 해결하자 가방 잃어버린 일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뭐 그리 비싼 가방도 아니었고, 여권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고, 5일 동안의 추억이 담긴 카메라도 무사하고, 휴대폰 꺼질 걱정도 안 해도 되니 가방을 잃어버린 일은 밥 값 계산 잘못해서 거스름돈을 몇 백 원 덜 받은 일 정도, 제게 그러했습니다. 거기다 사원증까지 가지고 갔어요, 그 도둑이. 지중해에 확 던져 버리고 싶었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나 몰라요 하하(이것은 복선이 되어 저는 그다음 해에 퇴사를 하였습니다 하하).


전 사실 계획한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지 않으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 편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돌발사건이 생기면 급격하게 우울해지고 부정적인 감정에 꽂혀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가방을 잃어버리는 것은 분명 제 계획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머나먼 외국에서 말이죠. 계획에 없는 일이 생겼고 가방을 찾느라 계획에 없던 시간을 소비하였고 생각보다 빨리 구하긴 했으나 충전기를 구하느라 또 계획에 없던 시간을 써 버렸죠. 당황해서 오후에 뭘 하기로 했는지도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고요. 전형적인 저라면 이런 상황에서 드러누워 버립니다. 이불 뒤집어쓰고 울어버립니다. 큰 일, 작은 일을 떠나서 사소한 실수, 부주의에도 화가 나는 것입니다. 거이에 일정까지 틀어지면 더더욱.


하지만. 햇살 때문이었을까요, 술기운 때문이었을까요, 던져 버리고 싶던 사원증이 사라져서일까요, 여행 중이기 때문이었을까요. 무엇 때문이었는지, 평소의 저와 다르게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좋지 뭡니까. 자꾸 웃음이 나오더니 이유 없이 너무 신나는 거예요. 정말 나답지 않게요. 그래서 일단 바다에 가야지, 바다에 가서 유람선을 타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버스를 타고 콜럼버스 동상이 있다는 바로셀로네타 해변으로 갔습니다.

일상에서는 뾰족하게 날이 설대로 서 있는데 바닷바람 맞으며 허허실실하는 저는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만 같았습니다.


안경을 잃어버린 건 애라 모르겠다, 도수 있는 선글라스로 대충 때웠습니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불안 초조해집니다. 인천공항에서 내리니 저녁 일곱시가 다 되어 갑니다. 3월의 저녁 일곱시는 벌써 어둑어둑하지요. 스페인에서는 괜찮았는데, 내 나라 한국에서 그것도 어둑한데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려니 아 이거참, 멘탈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인천공항에서 광명역으로, 광명역에서 또 부산역으로, 부산역에서 또 집까지 가야 합니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다 되었는데, 그렇습니다. 저는, 자정이 다 되어 가는 그때까지 선글라스를 쓰고 리무진을, 또 기차를, 또 지하철을 탔습니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저 창피해 죽을 뻔한 일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지금은 또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어 좋기까지 합니다.


일체유심조. 원효대사 말씀처럼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임을, 일상에선 여전히 날 세운 고슴도치이지만 가끔 이때를 떠올리며 조금은 여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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