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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국화 Sep 10. 2022

혼자 여행은 언제나 우당탕탕 2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지던 나의 위치

아름다운 호숫가의 그림 같은 마을, 마치 동화 속 풍경을 실사판으로 만들어내 세트장 같은 비현실적인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잘츠캄머구트의 진주라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입니다. 한동안 우리나라와 중국 관광객들에게 꽤 유명했던 관광지라 한 번쯤은 들어보셨거나, 할슈타트라는 이름이 생소하더라도 호숫가에 교회와 아담하고 예쁜 집들이 어우러진 사진을 보시면 아하 하실 텝니다.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아의 휴양지인 잘츠캄머구트의 수십 개 호수 중 하나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2015년 9월 오스트리아 여행 중 제가 가장 기대했던 곳입니다.


저는 잘츠부르크에서 며칠간 머물며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할슈타트로 다녀올 예정이었습니다. 잘츠부르크에서 할슈타트는 거리는 멀지 않지만 직통 열차가 없어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내려서는 배까지 타야 합니다. 혹자는 여행 가서 무슨 고생이냐 하지만 이러려고 여행하는 거 아니겠어요?


잘츠부르크에서 할슈타트로 향하는 기차 밖 풍경은 그야말로 예술이었습니다. 영상미 하나로만 승부한 감독이 찍은 영화 속 배경 같았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지인들과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길을 지나가 본 적 있는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어, 나는 할슈타트도 너무 좋았는데 가는 길이 더 힐링이었어. "

제 말이요! 이동 자체가 관광 상품 같았습니다.


그렇게 눈 호강하며 환승역에 도착하였습니다. 환승할 기차의 플랫폼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이동하니 어맛, 바로 기차가 들어왔습니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다니 오늘 운이 좋으려나 봅니다. 환승한 열차는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호처럼 아주 작은 시골역까지 전부 정차하는 기차였습니다. 기억으론 환승해서 3-4 정거장만 가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니, 아무리 달려도 제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안 나오는 겁니다. 뭔가 이상해서 구글맵으로 내 위치를 찾아보니, 뜨앗, 현재 내 위치는 체코 국경 근처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반대방향 기차를 탔던 것입니다.


반대방향 기차를 탔다는 걸 인지한 순간 그다음 정차역에 바로 내렸습니다. 내린 역은 매표소조차 없는 간이역, 간이역뿐인 아주 작은 시골이었습니다. 간이역을 지키는 아저씨는 로빈 윌리엄스를 닮아 인상은 좋았지만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손짓 발짓에 아는 독일어 단어를 몇 가지 섞어서 기차를 잘 못 탔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대충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제가 그 아저씨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서로 난감해하던 차에 몸집이 크고 머리에 두건을 쓴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다가와 로빈 윌리엄스 (닮은) 아저씨랑 인사를 나눕니다. 로빈 윌리엄스 (닮은) 아저씨랑 원래 아는 사이인지 뭐라 뭐라 몇 마디 하고는 기분 나쁘게 웃으며 저에게 Hello 합니다. 영어를 하냐 물으니 꽤 한다며 자기랑 술 한잔 하겠냐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척하며 할슈타트로 갈 건데 기차를 잘 못 타서 여기서 내렸다, 반대 방향 기차를 타려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기차 안에서 사정을 말하면 기차표를 끊어줄 거라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내가 탈 기차는 40분 뒤에 오는데 그동안 자기랑 술 한잔 할래라면서요. 싫다고 거절했는데 둘이서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계속 속닥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해서 너무 무서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너무 겁이 나서 그 자리를 당장 떠나고 싶어 졌습니다.


혹시 근처에 카페가 있냐 물으니 두건 아저씨는 여기 정말 작은 시골이라 카페 같은 건 없고 잘 아는 술집이 있으니까 한 잔 사줄게라고 말합니다. 그놈에 술! 술에 대한 열정이 정말 대단합니다. 괜찮다고 말하며 급속도로 그들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구글맵을 열어보니 5분 거리에 대형마트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안전할 것 같아 전속력으로 뛰어갔습니다. 대형마트에 들어가니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여기 와 있나 봅니다. 길거리에 사람 한 명 구경하기 어렵더니 마트는 사람으로 북적였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되어 현지 식료품 구경하다, 갓 구운 빵도 사 먹으며 시간을 때웠습니다. 마트 주차장 쪽으로 나와보니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너무 예쁘고 날씨도 좋았습니다. 우연히 만난 풍경치곤 횡재라는 생각에 풍경사진도 찍고 셀카도 찍다 기차시간 얼추 맞추어 역으로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두건 아저씨는 사라졌고 기차가 곧 들어왔고 전 무사히 할슈타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아시면 경악하실 일이죠. 제주도만 가도 제주도의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여기가 어디라고 다 큰 처자가 혼자 오냐 말하십니다. 인적이 드문 곳은 우리나라라도 위험한데 외국에서, 그것도 가려던 곳도 아니고 기차를 잘 못 타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이라니요.


하지만 기차 잘 못 타는 게 별 일도 아닌데다 결과적으로 별일도 없었습니다. 큰일 날 뻔했잖아? 아, 그 아저씨요?  얼마 전 회사 앞에서 열심히 골프 스윙연습하고 있는데도 어떤 아저씨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다가오던데요. 특별히 오스트리아라서, 아니면 혼자 여행이라서, 그래서였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골프연습장에서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테니 연습이나 하시라고요. 전 원래 이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이 탓이겠지요. 나이가 드니 조금 더 나를 위하고 남 눈치를 덜 보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냥 나이 먹어서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경험이 저를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 경험엔 당연히 여행도 포함되고요. 사실 거의 모든 것이 집약된 경험이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잃어보고 기차를 잘 못 타 보고 불쾌한 사람을 경험하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혼자 여행이 안전하니까 좋기만 하니까, 그래서 하는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위험하지 않냐고 물으시면 당연히 위험합니다. 쓸쓸하지 않냐 하시면 간혹 쓸쓸합니다. 당연합니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그리고 아직 마주치지 않은 다른 돌발상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나라에서 혼자 다니는 것도 위험한데 낯선 곳에서 혼자 다니는 게 어떻게 위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자 혼자 밤에 다녀도 안전한 나라"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세상 어디에도 완벽하게 그런 곳은 없으며 주어를 남자로 바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모든 에는 일장일단이 있죠.


저는 어린 시절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동물원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은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힐 걱정도 없고 배고프면 사육사가 알아서 먹이를 주니 행복하겠다고요. 정말로 그럴까요?


저는 무탈하게 사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 수정하겠습니다. 저는 무탈하게 사는 것만이 "저의" 인생 목표는 아닙니다. 그런데 무탈하게 사는 것이 목표일 수도 있죠, 그것이 숭고하지 않다고 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목표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보다 쉬운 목표를 택했습니다. 보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다양한 세계를 보고 내가 최대한으로 성장해 보겠다고요. 안전할 것 같아서 여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폭약을 들고 불구덩이에까지 들어가지도 않고요. 일장과 일단을 항상 계산하며 강해진 맷집만큼만 버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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