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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국화 Jan 18. 2022

같은 날 같은 장소의 기억

어쩌면 우리의 만남은 처음이 아닐지 몰라

다른 지역으로 발령난 회사 사람이 밥을 먹자 해서 따라 나섰다. 같은 부서도 아니었고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몇 차례 업무협조한 인연이라고 챙겨주니 고맙고 업무협조할 때 까탈스럽게 굴었던 것이 부끄럽고 미안해진다.


포슬포슬한 계란이 폭신하게 덮인 오므라이스를 앞에 두고 우리의 대화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애엄마였으면 애들 이야기로 떼우겠건만 둘다 미혼이다 보니 할 말이 참 없다. 일부러 어긋나려는 건 아닌데 공통분모를 찾기가 어려웠다. 예민한 주제는 피해서 날씨 이야기를 했다 업무 이야기를 했다가 주식 이야기를 했다가 전혀 연결성 없는 대화를 이어가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문득 스치는 기억이 있어서 무심코 말을 꺼냈다.

- 그런데 빈 가셨을 때는 오스트리아에만 계셨던 거에요?

- 아, 빈이요, 아니요, 빈에서 헝가리로 넘어갔어요. 그 때 엄청 고생했는데......그 때 난민들이 유럽으로 몰렸던 그 때여서 헝가리 가는 기차 못 탈 뻔 했어요.

- 어, 그 때 가셨어요? 나도 그 때쯤 오스트리아 갔었는데, 혹시 몇 년도에 가셨어요?

갑자기 대화가 물흐르듯 이어졌다.

- 진짜요? 그 때가 몇 년이었더라....오래 되어서....

- 저는 2015년이네요. 2015년 9월이요.

- 어...저도 그 때쯤인 것 같은데요....어어, 맞아요. 저도 사진 보니까 2015년 9월이네요.

- 우와 어쩌면 같은 날 빈에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사진 날짜를 비교해 보니 얼추 날짜도 겹친다. 2015년 9월 초.

신기하게도 복장도 비슷하다. 그렇지. 그 때는 이렇게 입는 게 유행이었지.

- 빈에서 한인민박에 있었는데....

- 어, 저도 빈에서는 한인민박에 묵었어요.

- 진짜요? 아침에 밥 주는 한인민박.

- 어, 맞아요. 아침에 빵 아니고 밥 주던 한인민박요. 아 진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네요.

으아, 이제 식사시간이 끝나가는 게 아쉽다. 어째선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이렇게 늦게서야 내 머리를 스쳤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여행 이야기로 주거니 받거니하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 저 스페인 갔을 때는....

- 스페인 어디 가셨어요?

- 저 바르셀로나에만 8일 정도 있었어요.

- 저는 마드리드, 론다, 그라나다 갔었는데요, 바르셀로나 너무 가고 싶었는데, 바르셀로나는 바르셀로나만 꼭 다시 온다하며 뺏었어요.

- 저는 마드리드요. 마드리드는 꼭 다시 와야지 하며 뺐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질줄이야...

- 그러니까요.


이쯤되니 참 아쉽다. 조금 일찍 친해졌다면 좋았을텐데. 나는 어째서 처음부터 우리 사이의 거리를 정해두었던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같은 회사에서 만나게 된 날보다 훨씬 오래 전 같은 날 같은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특별한 인연인데 이렇게 이별이라니 아쉽다.

두 번의 이직, 거의 10년 정도의 사회생활로 터득한 교훈이랍시고, 더이상 직장동료에게 동료 이상의 애정을 갖지 말자고 다짐했던 나님, 당신 참 못났다. 이 똑똑한 척하지만 사실은 상처투성이 영혼아!


나는 내가 나이를 먹으며 보다 강해지고 뻔뻔해진 줄 알았다. 그래서 나의 나이듦을 즐기고 기대했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며 강해진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일은 처음부터 피했던 것이다. 어릴 땐 넘어질 용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손 끝에 상처나는 것도 두려웠나 보다. 하지만 우리 인생, 길면 얼마나 길다고, 고이고이 묵혀두었다 되팔 명품백도 아닌 마음을 뭐하러 아꼈을까. 조금 더 다가가고 좀 잘해줄것을.


또 연락드리겠다는 그녀에게 잘 지내시라 마지막 인사를 꺼내며, 문득 코로나가 풀리면 같이 여행가자고 할까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다. 참, 이놈에 주책은.



p.s. 요며칠 이불속이 젤 좋아만 외치며 무기력하던 내가 여행 이야기가 나오니 눈이 반짝거리고 심장이 빨리 뛰며 안면에 홍조가 생기고, 말이 빨라지고 유창해진다. 그러니까, 코로나야 좀 끝나주라. 여행 좀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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