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찬 배낭보다 어깨 쳐지게 하는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여행메이트
어떤 여행이 좋은 기억으로 남을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다. 날씨, 음식, 숙소, 돌발상황 발생, 현지인들의 친절, 특별한 추억 등등.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여행메이트가 그 여행의 승패를 결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누구와 여행을 가는지에 따라서 어떤 여행은 딱히 뭘 한 게 없어도 즐거움이 배가 되고 어떤 여행은 좋은 곳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어도 영 흥이 나지 않기도 한다.
내가 여행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여행메이트는 매사에 시큰둥한 사람이다. 차라리 이건 꼭 먹어야 하고 여기는 꼭 가야겠다며 뭐든 자기위주인 사람은 견딜만 하다. 마음이 상할 수는 있지만 그 고집 덕분에 나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먹어보고 생각지 못한 곳에 가보고, 하다 못해 하하 우리 그 때 그랬었지라며 돌아와서 할 말이라도 생긴다. 하지만 매사에 시큰둥한 사람, 감각과 감동의 민감도가 떨어지는 사람은 여행내내 나를 불안하게 하고 내 기분도 쳐지게 만든다.
"별거 없네."
뭐 얼마나 별거를 바랐던 것일까.
"별 맛 없네."
뭐 얼마나 대단한 맛을 원했던 것일까.
그래서 지금까지 여행한 도시 중 나의 최애 원픽은 여전히 로마임에도 로마여행만큼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이유가 바로 시큰둥한 여행메이트 때문이었다.
포로 로마노를 보기 위하여 카피 톨리노 언덕을 올랐을 때 그녀는,
"저거 보거 온거야? 아무 것도 없잖아. 그냥 폐허네, 폐허."
덥고 힘든것 참고 올라왔더니 고작 이모양이냐는 그녀의 반응에 내가 미안해 지는 것은 왜인지.
또, 트레비 분수 근처에서 젤라또를 먹으려는데,
"저거 엄청 달기만 하고 맛없대."
"하하, 그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 먹어는 보지 뭐. 여기가 되게 유명한 집이래."
내돈으로 젤라또 사 먹는 걸 왜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인지.
"음....예상한 그 맛이네. 싸구려 맛."
솔직히 나는 맛있기만 했다. 내가 로마에 있고, 유명한 사람도 사 먹었다는 그 젤라또집이 내 눈 앞에 있고, 그걸 직접 사들고 나와서 한 입 먹는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이 정도로는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 옆에서는 나도 힘이 빠진다. 진짜 무거운 것은 짐가방이 아니라 모든 것에 실망한다고 말하는 여행메이트였음을 그때 알았다.
이런 사람들은 수준이 높아서 웬만한 것에 감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둔한 오감과 낮은 수준의 감성지수 때문에 어떤 것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폭탄이 떨어지는 정도쯤 되어야 알아차리지 불어오는 바람이 어제보다 따뜻해졌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느껴보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둔감한 것이지 남풍의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남풍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 옆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거기다 그 사람이 남풍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까지 하면 남풍에 들떴던 마음은 한 순간에 부서진다.
로마와는 반대로 도쿄는 서울과 별반 다를 게 없고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데 도쿄를 갔던 기억만큼은 행복했다고 기억된다. 그것 또한 도쿄를 여행시켜 준 친구 덕분이다.
내 친구는 도쿄에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벌써 몇년 째 도쿄에서 살고 있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매년 친구를 보러 도쿄에 갔었는데 그 때마다 친구는 뭐 먹을지, 어디 갈지 신나서 설명해준다.
사실 나야 처음 먹어보고, 처음 가보는 것이니 신이 나지만 친구는 이렇게 찾아오는 관광객이 한둘도 아닌데다 몇년째 살면서 웬만한 건 다 먹어보고 웬만한 데는 다 가봤을텐데, 또 얼른 자고 내일 재밌게 놀자고 말해준다. 어떻게든 즐거움의 포인트를 찾아내는 친구 덕분에 나도 행복했던 것 같다.
어린시절 절친도 여행 한 번 다녀왔다가 절교를 하기도 하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연인이 여행 다녀와서 헤어지기도 한다. 반면에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는 연인들도 있다. 여행스타일이 맞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스타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행은 노동이 아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많은 활동이다. 휴양지 리조트에만 있다가 오는 것이 아닌 이상 평소보다 많이 걷고 신체 움직임이 많은데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잘맞음이란 서로에 대한 배려 없이는 불가능한 말이다.
배려의 중요성은 말해 무엇하리. 그렇다고 모든 일정과 식사메뉴, 숙소, 한 장소에 머무르는 시간까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정도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감정과 기분에 대한 최소한의 보살핌을 말하는 것이다.
감흥의 민감도는 하나의 재능임과 더불어 옆 사람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차라리 여기도 가자, 저기도 가자, 이것도 먹자, 저것도 먹자고 해서 지치게 하는 사람과 여행할지언정, 이것도 시큰둥 저것도 시큰둥, 이건 이래서 안먹고 저건 저래서 안먹고 여기는 먹을 것도 없다며 불평하는 사람과는 절대로 다시는 여행을 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