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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국화 Sep 15. 2021

여자 혼자 여행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당신께

일상은 대단히 안전한가요

2018년 3월. 나는 바르셀로나 시청 맞은편 골목 젤라또 가게에서 젤라또를 주문하고 열심히 인증샷을 남기고 있었다.

"한국 분이시죠?"

뒤돌아 보니 선한 인상의 중년부부가 젤라또 한 컵을 시켜 나눠드시고 계셨다.

"네, 한국분이신가 보네요."

"여기 유명한 데에요? 이거 맛있다고 해서 한 번 시켜봤는데 우리는 뭘 잘 몰라서...."

"아, 저도 검색해서 찾은데는 아니고 지나가다 보이길래 들어와 봤어요. 별로세요?"

"아니....우리는 뭐 잘 몰라서..."

두 분은 어제 도착하셨는데, 출발 전에 검색해 온 맛집들을 찾아가봐도 짜기만 짜고 입에 안맞는데다 날씨까지 이상기후로 추워서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 중이라 하신다. 아내분은 다른 나라로 가고 싶으셨는데 남편이 우겨서 스페인 왔더니 하나도 재미 없다며 귀엽게 툴툴거리시고 남편분은 내가 이럴줄 알았냐며 머쓱해 하신다. 두 분은 티격태격하셨지만 연세 있으신 두 분이 패키지 관광도 아닌, 두분만의 오붓한 자유여행을 계획하여 오신게 나는 마냥 보기 좋기만 하였다. 거기다 나는 다음날 귀국이었는데 이분들은 이제 시작이시라니 마냥 부러웠다.


뭐 맜있는거 먹어봤냐, 거기는 덜 짜냐, 우리는 어디로 갈건데 거기는 어떻더냐는 문의에 신나서 조잘조잘 그동안의 여정을 풀어 놓았다. 한참 경청하시던 두 분 중 남편분이 물으셨다.

"그런데 혼자 왔어요?"

"네, 혼자 여행 중이에요."

"우리딸이 혼자 여행간다고 하면 아마 허락 안했을거에요."

"하하 그렇죠. 저희 부모님도 허락 안하셨어요."

천방지축 망아지같은 딸 때문에 애가 타실 우리 아버지의 슬픈 눈빛이 떠올랐다. 티격태격하시던 부부가 우리딸이라면 허락 안했을거라는 말에 드디어 한편이 되신 모습이 죄송하지만 귀여우셨다. 나를 말리는 우리 부모님, 그리고 한 번 본 적도 없는 우리 부모님 심정에 공감하시는 남에 부모님 마음을 모를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따뜻함에 감사했다. 하지만 딸 혼자 여행가는 것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변하시길 바라본다. 


만약 딸이 혼자 해외출장을 가야한다면?


요즘 세상에 엄청난 남초회사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해외출장은 위험하니 남자직원만 보내겠다는 회사는 없다.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딸이 유능하여 혼자 해외출장을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도 위험하다고 반대하실 건 아니잖아요. 백번 양보하여 출장은 공항-방문기관-호텔에만 있다가 오는거라 만나는 사람도 한정적, 동선도 단순하다지만 대통령이 아닌 다음에야 전용기를 타고 해외방문을 하는 게 아니니, 기내에서, 그리고 공항에서 호텔까지, 호텔에서 방문기관까지 낯선 사람과 낯선 환경에 노출되는 것은 여행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여행은 내가 비교적 안전한 시간과 지역으로 동선을 계획할 수 있지만 출장은 그럴 수 없다. 방문기관이 테러 위험지역 내에 있으면 무서워도 가야하고, 방문기관이 밤 열한시에 만나자고 하면 또 그에 따라야 한다. 심지어 술도 마셔야 할 수도 있다. 나 혼자 여행가면 술은 호텔에서만 마시거나 아예 안 마실 수도 있지만 말이다.


여럿이면 안전할까


나도 내가 여행을 계획할 때는 하나도 겁나지 않았는데 회사에서 보내는 출장은 몹시 두려웠던 적이 있다. 심지어 혼자도 아니고 부장님 이하 다수의 동료와 함께였는데도 혼자 여행보다 훨씬 겁이 났다.

 3일 일정으로 북경 출장을 가야할 일이 있었는데 내가 소속된 기관이 북경의 방문기관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할 위치다 보니 나의 상급자들은 회의보다 접대에 더 정성을 쏟았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3일간 팀 전체가 북경 출장을 간다고 하니, 엄마는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 하시는데, 엄마는 한 번 본 적도 없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 줄 알고 마음이 놓이는걸까? 나는 오히려 하나도 마음이 안놓이는데. 그 때는 나이도 어릴 때여서 더 겁이 났다. 내 일행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그거야 모르지. 나이 어린 여자 직원이 밤늦게까지 처음 보는 남자 외국인들과 술을 마실 일을 만들지 않으면 좋을텐데. 물론 그 외국인들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나 혼자 갔다면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었겠지.

다행히 아무일도 없었지만 밤 열한시에 노래방 어두운 조명 아래 마시기가 무섭게 채워지는 술잔에도 바짝 긴장할 수 있었던 나의 체력과 정신력 덕분이었지, 그것이 타인의 선함 덕분이라거나 내 동료들의 케어 덕분은 아니었다.

그러니 '여자 혼자'보다 '여럿'이 딱히 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일상은 그렇게 안전한가요?


여자 혼자든 여럿이든 그러니까 해외에 가지 말라고 하신다면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안전하냐고 묻고 싶다. 집 다음으로 안전할 것 같은 회사, 그 회사는 그렇게 안전한가요?

몇 년 전 회사의 나이 많은 남자 차장이 나에게 호감을 보였다. 몹시 성가시고 몹시 거북하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원치 않는 사람들의 호감이 주는 불편함에 익숙한 편이다. 일단 (그 때는) 젊은 여성이라 누구에게나 호감점수 +60 받고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학벌이 +10점, 변호사라서 +10점, 남 듣기 싫은 말은 절대 안하고 듣고 싶은 말은 최대한 많이 해주는 것 때문에 +30만 해도 이미 100점 넘었다. 거기다 전혀 착하지 않지만 착하게 생겨서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 이 호감은 이성으로서의 호감만 말하는 게 아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 정도? 나도 안다. 나는 남한테 부탁은 좀처럼 못하면서 남이 하는 부탁은 또 좀처럼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딱히 친해서 피해볼 게 없는 사람이라 호감이 아니라도 접근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은근 자뻑하는 편이라 스스로 인기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 원치않는 호감도 다 내 팔자고 업보려니 하는 편이다.

아무튼 다시 나이 많은 남자 차장으로 돌아가서, 그 사람이 보이는 호감이 처음에 이성으로서의 호감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유부남이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는 생각하지 못했다. 회사에서 다들 자신을 피하는데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니 어디 엉겨붙을 데가 나밖에 없어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하다. 내가 야근을 하는데 본인은 할 일 없이 기다리고 있다. 설마, 나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내가 짐을 챙기니 본인도 짐을 챙긴다. 우리 오늘 힘들었는데 어디 가서 맥주나 한 잔 할까. 헐~ 이게 무슨 X소리. 싫다고 거절하니 그러면 집에 태워준다고 한다. 밤길은 위험하니까. 밤길이 설마 너보다 위험할까. 거절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다음 날도 마찬가지다. 다음 날은 야근하다 잠시 그 차장이 화장실 간 사이에 기회다 싶어 가방 챙겨 사무실에서 뛰쳐 나왔다. 그런데 어느새 돌아온 그가 헐레벌떡 나를 따라 잡는다. 아니, 기다려줬더니 의리없게 혼자 가냐고. 왜 기다리시는데요 라고 물으니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답할 말이 없겠지. 그가 나보다 회사를 일찍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니가 뭐라고 기다리냐고 한 소리 했을텐데 아 이런 게 회사고, 이런 게 조직이구나. 쌍욕을 해도 시원찮을 사람이 나보다 회사를 하루라도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는.

성가시고 불쾌하지만 얼마간 그냥 둔 이유는 제까짓게 나를 어쩌겠냐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회사를 때려칠 것도 아닌데 저러다 말겠지, 저러다 발령나면 그만이지 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까짓게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걸 본인도 아니까 자꾸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거구나. 술을 먹여서, 아니면 약을 먹여서. 그럴 수 있지.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을 수 있는데 제까짓게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수 없지.  

그 길로 인사팀으로 달려갔다.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할 생각이 없으니 분리조치해 달라고 했고, 인사팀에서는 바로 조치해 주었다. 사과를 할 사람은 그 나이 많은 차장이었지만 사과는 우리 팀장님과 인사팀장님이 대신 하셨다. 내가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만 하면 조직차원에서 그 차장의 퇴사조치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이름 오르내리는 게 싫었다. 다른 피해자들을 막기 위해 나 하나 희생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솔직히 그 정도로 조직에 애정이 있지는 않았다.

이 회사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회사이고, 공공기관이고, 비교적 female-freindly한 회사이다. 겉으로 보기엔 안전해도 너무 안전한 회사이다. 그리고 나는, 30대였으니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었고 좋은 학벌에 전문자격증이 있고 정규직이며 회사에서 입지도 비교적 탄탄한 편이었다. 사람의 등급을 메기자는 게 아니라 그 만큼 나는 무기도 충분했다는 의미있다. 그런데도 나의 일상에 이런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 일상은 뭐그리 안전하단 말일까? 어차피 일상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다.


어쨋든 여행은 내가 감수하는 리스크이다. 일상은 내가 대가로 받은 안전이다. 그런데 여행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고 일상은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 그러니 '여자혼자 여행'을 그렇게 반대할 명분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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