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현직장으로 이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전직장의 전무님이 현직장으로 소포를 하나 보내 주셨다. 뭔가 싶어 풀어보니 책 한 권이 고이 포장되어 있다. 표지 안 쪽에는 앞으로의 날들을 응원한다는 자필 메세지와 함께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책 선물과 응원에 감동하여 전화를 드렸다. 전무님은 "나 같은 사람이 이런저런 말해봤자 소용없을 테고 훌륭한 사람이 쓴 책 한 권이 낫잖아." 한 마디를 남기셨다. 그리고 바쁠 텐데 일이나 보라 하시며 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비슷한 춘추의 어른들이 으레 그러하듯 새직장에서는 어떻게 하라거나 인생은 어떻다는 둥의 말씀은 한 마디도 없이 말이다.
전무님은 한 직장에서 30년을 일하시는 동안 영광도 굴욕도 다 겪으시며 결국 임원까지 되신 분이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신데다 임원이라는 자리 때문에 전무님에 대한 직원들의 호, 불호는 갈리지만 업무능력과 업적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 전무님은 "나 같은 사람"이라 표현하셨지만, 이 정도 되시면 다른 어른들은 몇 박 며칠을 본인 성과를 읊으시며 직장생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실 텐데. 다른 말씀 없이 책 한 권을 건네시며 앞 날을 응원해 주시는 전 직장 임원이라니, 이거 진짜 실화인가?
이직을 하려니 동기마저 배신자 취급을 하는데 말이다. 다른데 가봤자 똑같다는 소리는 뭐 세대공통이고. 나보다 못난 사람들이 나를 위한다는 말로 사실은 두서도 없고 종종 기분만 긁는 소리를 쏟아내는 마당에. 진짜 어른은 이렇게 가르침을 주셨다. 심지어 가르침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까지.
그러니까 오늘도 다 너를 위해서라며 말을 꺼내는 그대여, 진짜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래서 가르침을 주고 싶다면, 제대로 된 훈계는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품격있는 사람은 잔소리마저 품격 있었다.
ps. 요즘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오늘 읽은 내용 중에, 한국인은 남들이 이래라 저래라 나를 통제하려 드는 것을 못 견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한국인이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은 세계 최고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책을 읽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한국인은 남의 말 안 듣는다. 절대 안 듣는다. 오죽 안 들으면 스승의 말조차 안 듣는다. 제멋대로인 한국인은 자기 멋대로 해야 신명이 풀리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에 "다 너를 위해서"란 말을 붙인 들 소용없다. 우리 전무님처럼 한 번 해 보시길. 설령 통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있어 보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