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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국화 Aug 15. 2021

명문대 졸업장보다 중요한 것

애 없는 미혼 직장인의 육아 참견기

얼마전 오랜만에 대학 동기를 만났다. 아이가 둘인 그녀는 요즘 아이들 교육이 최대 고민이라고 한다.

주변 엄마들의 사교육, 선행학습이 지나치다고 느끼지만 남들 다 시키는 것을 본인만 시키지 않으려니 그것도 그럴 자신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분명 이런 선행학습을 한 적이 없고, 선행학습 없이 S대에 들어갔는데, 만약 선행학습을 하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았을 것 같아 아이에게 무조건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많이 시키는 게 정답일까 고민이 든다고 한다.


"아이가 없는 내 입장에선 말이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내가 아이 엄마와 같을 수 없고, 아이 교육에 있어서도 아이 없는 내가 나을 수 없는데도 나의 의견을 묻는 그녀가 고마워, 그리고 아이 엄마가 아니기에 의견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도 사교육,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 또래들과 비교하였을 때, 그리고 현재의 상황과 비교하면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했다고 말하기 몹시 민망한 정도이다. 아니, 나의 학창시절에도 나 정도면 선행학습, 사교육은 안 한걸로 쳐줬었다. 그런데도 고3이 시작되며 이미 나는 지쳐 있었다. 남들은 인생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한다는 고3 시절, 나는 공부량을 쌓는 것보다 버티는 게 문제였다. 이미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이라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두 번은 없다는 절박함이 들었다. 그 절박함이 나의 고3시절에 없는 체력을 바닥까지 쥐어 짜게 한 원동력이었고, 그나마 선행학습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덜 했기에 쥐어 짤 게 남아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이가 없는 내 입장에서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말하자면 지나친 것은 모자름만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보면, 나도 친구와 생각이 같다. 이건 아닌데 싶지만, 남들 다 시키는 것을 안 시킬 용기는 없다. 우선 내가 잘 못했던 것들을 미리 시키고 싶다. 그래서 일단 노래부터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악기는 두 가지 정도, 미술도 미리 가르치고 싶다. 아이가 내가 못했던 것을 잘 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잘 했던 것을 못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외국어는 빠를 수록 좋으니 학교 들어가기 전에 영어와 중국어 정도는 가르치고 싶다. 수학은 당연히 잘 해야 하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필요한 것은 결국 모국어를 잘 읽고 잘 쓰는 능력이니 독서교육도 빼 놓을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아이에게 24시간이 부족하다. 이렇게 시키다 보면 체력이 바닥날테니 운동도 가르쳐야 한다.

아이가 없는데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본인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러니 그거 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소용없다고만 말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니 말이다.


 어차피 인문사회계열이나 이공계열로 갈 아이라면 노래, 악기, 미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인문사회계열로 갈지 이공계열로 갈지는 지금 확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부모 스스로 아이의 미래를 한계 짓는 것은 지양했으면 한다. 애아빠도 나도 예체능에 재능이 없었는데 애가 무슨 예체능을 하겠어, 있는 집도 아닌데 무슨 예체능이야 같은 생각 말이다. 애아빠도 나도 재능이 없는 것인지 재능을 키우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애아빠도 나도 없는 재능을 아이가 타고날 수도 있는 일이고.

 아무튼 설사 예체능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노래, 악기, 미술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감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려서 배워놓은 피아노는 입시준비를 할 때든, 고시공부를 할 때든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건전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가 되어 주었고, 내가 여가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내가 아는 신경외과 의사는 당직 대기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며 스트레스를 풀고, 내가 아는 한 교수님은 여가시간에 작곡을 하여 지인들의 특별한 날 자작곡을 선물하기도 한다. 입시가 인생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예체능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수 없고, 심지어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예체능은 진가를 발휘한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선행학습이나 사교육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다 많은 직업군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듯 명문대 졸업장도 날 줄 아는 사람에게나 날개가 되어준다.

어려서부터 성공한, 그것이 세속적인 의미의 부와 명예이든 인류에게 좋은 영향력이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며 스스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면 자신에게 필요한 교육과 커리어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명문대 졸업장은 날개가 되어준다.

하지만 특별한 목표없이 일단 가고 본 명문대의 졸업장은 받고 보면 허무하다. 그래서 이게 무슨 소용이람. 직업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 졸업장이 무슨 희망티켓 같아 보이지만 정작 직업이 결정된 후에는 이게 무슨 소용이었나 싶은 게 명문대 졸업장이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아는 직업군이라고는 교수, 공무원, 의사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지방에서 좋은 대학 보낸 부모님들도 전공 불문하고 명문대 들어갔으면 당연히 고시공부해야 하는 줄 아셨고, 특별한 목표없이 일단 하고 보는 것은 대학 들어간 후에도 여전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날에는 지방에서 자라  S대 나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지금 인생이 대단히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어떤 직업을 미리 알았다면 어쩌면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든다. 그랬다면 대학시절을 좀더 다르게 보냈을 것이고, 그랬다면 S대 졸업장은 내게 날개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S대 졸업장을 날개로 만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절대 S대 들어간 것을 후회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에게 S대 졸업장은 말하자면 샤넬백 같은 것이다. 이게 참 가지고 싶었고 나에게 몹시 소중하고 다음 생에도 가지고 싶지만 내 인생에 반드시 있어야 하거나 있음으로 인해 인생이 달라지게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내 아이도 S대 갔으면 좋겠지만, 나와는 달리 S대 졸업장을 샤넬백이 아닌 날개로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런 관점에서 교육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일단은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많이 볼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고민을 말하였던 내 친구는 아이들에게 이미 좋은 환경을 선물하고 있고, 엄마 스스로 아이를 위한 것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으니, 친구의 두 아이들은 복 받은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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