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국화 Oct 05. 2022

환장하거나 혐오하거나

명품백을 대하는 한국인의 자세

명품에 환장한 자들의 세계


몇 년 전 직장동료는 나에게 말하길,

"이제 일한지 몇 년 되었으면 명품백 하나는 있어야지. 결혼식도 가야하고. 명색이 변호사잖아."

라고 하길래 어, 그래 하고 말았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결혼식은 가방자랑하는 자리인가, 결혼식에서 하객들 가방이나 보고 있는 사람들 보라고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명품백을 사야 하냐고 말이다.

그 때는 명품 브랜드도 잘 모르는데다 나에게 가방은 A4 사이즈 서류를 구기지 않고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또는 밝은 색이냐 어두운 색이냐로, 책 한권이 들어가냐 아니냐로, 나뉠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참 미안하게도 동료들이 거금을 들여 산 명품백을 명품백인지 몰라서 아는체를 못해 줬다. 알량한 자존심에 못 본 척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몰라서 말이다. 알았다면 가방 샀구나 한 마디는 해 줬을텐데.


얼마 전 브런치를 보다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작가님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니, 그래도 내 동료들은 기본적인 예의와 수준이라는 게 있었지만 내가 본 글 속에 등장하는 직장선배는 대놓고 천박했다. 아마 그게 천박한 줄 모르니 대놓고 천박할 수 있겠지만. 명품백을 구매하고 소유하는 것을 천박하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가방에 등급을 매긴 후 그것을 메는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 가방에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권위도 없는 자의 자의적인 "기준"("선호"가 아니라)이 천박함의 첫째요, 그것을 그대로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천박함의 둘째요, 이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니 천박함의 셋째이니, 그는 세가지 천박함을 가진 자였다.


명품을 혐오하는 자들의 세계


또다른 세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역시 몇 년 전 혼수로 양가 어머님들께 명품백을 마련해 드리는 트랜드가 있었다. 어느 정도 형편은 되지만 아주 넉넉하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그러한 집 자녀들은 결혼을 기회삼아 어머니께 생애 첫 혹은 그와 마찬가지인 명품백을 하나 안겨드렸다. 지금까지 잘 키워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내 또래도 아무렇지 않게 척척 사는 그 까짓 명품백 하나 함부로 못사신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에 굳이 과시라는 이름을 붙일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트렌드로 웬만한 중년 부인들은 명품백 하나쯤 가지고 계시는데 브랜드 없는 저가 가방을 들고 나서는 엄마의 모습에 문득 미안함이 들었다. 내가 진작 결혼했다면 우리 엄마도 혼수로 가방 하나는 장만했을텐데. 아, 지금이라도 내가 하나 사 드려야겠네.


그래서 엄마에게 평소 가지고 싶었던 가방 없냐니까 가방이야 짐 넣는건데 평소에 생각까지 하면서 일부러 사냐 하신다. 엄마 친구들 어떤 가방 들고 다니냐, 비슷한 가방 사드린다 해도 엄마 친구들은 가방 같은 거 안 다니고 다닌다, 엄마 나이엔 무조건 가벼운 게 최고라 하신다.


그래서 50-60대 어머니께 어떤 브랜드 가방 선물하면 좋을까라고 한 익명 sns에 올렸더니 악플이 쏟아졌다. 내용은, 명품은 왜 사는거냐, 마통 뚫어서(마통까지 뚫어서 산다고 안했는데....) 명품사고 신용불량자되면 엄마가 참 좋아도 하시겠다, 명품 사는 사람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비싼 돈 주고 사봤자 짝퉁으로 보인다, 명품백 들고 다니는 사람들 다 머리 비어보인다 등등.


익명 게시판에 근거 없는 악플이 난무하는 것은 치우지 않은 과일 껍질에 초파리 꼬이듯 당연한 일이다. 다만 놀란 것은 밖에 나가보면 열에 일곱 정도는 명품 또는 명품으로 보이는 가품을 들고 있다. 그만큼 일상적인 현상을 이렇게나 원색적인 비난을 한다고?


거기다 얼마전 내 친구 중 한명은 이런 말을 하였다.

"야, 너 명품 좋아하는 그런 애였어? 명품을 왜 사? 어릴 때나 명품 좋아하지, 난 나이 드니까 에코백이 제일 편하더라."

이 말이 나온 배경은 이러하다. 재작년쯤, 모든 자산이 폭등하고 보복소비라는 현상이 생겨나고 그 현상 중 하나로 샤넬 가방 열기가 아주 뜨거웠다. 샤넬백이 몇 달 사이에 수백이 올랐다는 기사를 보다 나도 샀으면 몇 백 벌었을건데라고 푸념에 친구는 명품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일단 내 말이 명품백을 사고 싶다는 말도 아니었고, 설령 명품을 선호하는 게 비난받을 일도 아닌데다, 어릴 때 명품이 아니라 에코백 들고 다니는 거 아닌가라는 의아함이 들었다. 친구의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명품이라는 단어에 반응이었다. 그것은 혐오의 표현이다.


사실은 같은 세계이다


당사자들은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겠지만 사실은 같은 세계이다. 혐오는 환장의 다른 표현이다. 그게 아니라면 고작 가방 하나에 거품 물고 비난할 것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환장도 혐오의 다른 표현이다. 명품백을 들고서 명품백을 든 타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여럿 본 적이 있다.


명품백이라 불리는 특정 브랜드의 가방을 사용하든 아니든 취향에는 우열이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취향은 어쨌든 존중한다. 다만 환장과 혐오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환장한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취향이 고급인 사람들은 가방 따위를 과시하지 않는다.

혐오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실을 중시하여 브랜드에 초연한 사람들은 브랜드를 욕하지도 않는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처럼. 여우는 애써도 목이 닿지 않으니 포도가 실 것이라 말했다. 애초에 포도 같은 건 안 먹는 여우는 포도가 시네 어떠네 말도 할 일이 없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