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D+25
벌써 회사를 나온지 25일이 되었습니다. 25일의 소회는 한 마디로 혼이 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을 했던 지난 날의 나에게 달려가서 함껏 비웃어 주고 싶습니다. 물론 바쁘다고 해서 엄청 돈을 잘 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경력을 홍보하고, 미래의 의뢰인들과 관계를 트고, 자문계약을 맺기 위해 제안서를 쓰고, 국선변호인과 소송구조단에 이름을 올리는 일 등 사건수임을 위한 준비절차에 투입되는 에너지와 시간이 과거 근로자였을 때 업무량의 몇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11월, 12월은 새해의 법률자문을 위촉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는 회사들이 많아 제안서와 서류준비에 하루를 다 쓰는 날이 많습니다. 각 종 위원회의 위원 선정, 국선사건 담당자 선정 등까지 하면 매일 입사지원서를 작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11월에 개업을 해서 이런 기회들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1월을 넘기고 개업을 하였다면 이런 기회는 모두 다음해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퇴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올 해는 채우자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연말 기준으로 임금인상분이나 상여금이 지급되는 회사들이 많아 연말까지 채우면 금전적으로 조금더 이득이라거나 그래도 한 해는 마무리하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조금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연말까지 계속 다녔다면 1년 농사거리를 놓칠 뻔 하였습니다. 물론 의도하거나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기회에 소탐대실, 인생지사 새옹지마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업무도 눈코 뜰새없이 바쁜데 학업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박사과정 한 학기가 끝나가니 학기말 논문과 발표 기한이 다가옵니다. 개업 첫 달은 비자발적으로 여유로울 것 같아 모든 과제를 퇴사 후로 미뤄놓았었는데, 회사를 다닐 때보다 학업에 더 신경을 못 쓰고 있습니다. 요 며칠은 휴학을 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일단 이번학기 마무리만 무사히 하고, 다음학기 시작 전까지 개업변 일상에 빨리 적응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퇴사를 하고 가장 큰 위기는 바로 대출 제한이었습니다. 평소 대출을 어느 정도 안고 살고 있었다면 퇴사 전에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인데, 평생 대출이랑 인연없이 살다가 지금과 같이 최악의 상황에서 유동성 위기를 맞으니 일생일대의 위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퇴사 직전에 최대한으로 대출을 하라고 합니다. 특히 공공기관, 공기업, 공무원들처럼 대출이 잘 나오는 직업군이면 더더욱 퇴사하기 전에 대출부터 받으라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합니다.
그다지 사고방식이 세련되지 못한 저는 대출에는 일단 거부감부터 있어서 대출은 남의 이야기로 담 쌓고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대출이 필요한데 대출이 안 된다고 합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현직에서의 소득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담보가 있어도 대출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말에는 원래 대출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하하하. 제가 신용점수가 거의 만점에 가깝습니다만, 신용카드도 결제일 전에 미리 사용대금을 결제하는 사람입니다만, 오래 쓰는 것도 아니고 딱 두달만 쓰겠다는데도, 원금 가액을 훨씬 상회하는 담보를 제공하겠다는데도, 절대로 절대로 대출이 안 된다고 합니다.
상환할 수 없는 빚을 내는 것은 인생을 위태롭게 합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빚투는 사회 전체를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시점에 유동성을 위한 차입은 심폐소생이나 중요한 수술과 같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에 구원의 손길이거나 크나큰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정책적으로 대출을 막아버린 이유와 목적은 어느정도 공감이 갑니다만, 나일론 환자들 때문에 구급차 출동을 멈추고 응급실을 폐쇄해 버리는 것과 같은 행태가 맞는지는 다시 생각해 주길 바랍니다. 일단 죽겠다는 사람은 살려놓고 나중에 엄살이면 엄하게 응징하는 방법을 찾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저는 여전히 빚이 싫고 대출은 최대한 빨리 상환하겠다는 성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예정이신 분들에게는 일단 대출부터 받아 놓으라 조언드리고 싶습니다. 하반기에 퇴사를 계획하고 계신다면 더더욱. 난 정말 대출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건실한 회사가 만기에 어음 100만원을 못 막아서 부도가 났더라란 말에 에이 거짓말이라고 했었지만, 아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25일이었습니다. 일은 예상치 못하게 바쁜데 그렇다고 바로 수입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학교는 어쩌나 싶고, 평생 처음으로 돈 구하려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다니며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혼이 반쯤 나가 있습니다. 굉장히 보수적인 성향인데다 항상 최악의 최악을 대비하는 편이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만, 아무튼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차갑기만 할 줄 알았던 바깥공기는 차가운 만큼 상쾌하고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이 온기를 보태주기도 합니다. 회사 밖은 차갑긴 하지만 분명히 상쾌합니다. 이 신선한 공기에 기분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