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7
<표백> 장강명 소설.
너무 잘 쓰여서 작가가 짜증 난 적은 처음이었다. 세뇌되었고, 가치관이 흔들렸다. 논리적이지 않지만 지나치게 논리적이었다. 느끼는 것은 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존재는 하지만 형태는 없던 그 마음을 대신하여 표현해 주는 듯했다. 10년도 더 전에 나온 소설임을 알고 한 번 더 놀랐다. 현재 나에게, 우리에게 괴로움을 안겨주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사는 지금에서야 생겨난 새로운 것들인 줄 알았는데, 정확하게 같은 것들인 그들들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내 옆에 공존한 채로 함께 살아왔었다는 참신한 깨달음.
그 책을 읽고 나의 결론은 '내 삶의 끝은 결국엔 자살일 것 같다'였다. 당장 그러겠다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는 말도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다만 그 시기의 전제조건이 있다. 슬픔과 절망이 없어야 한다는 것. 누가 봐도 더할 나위 없이 미래가 기대되는 '행복한 삶'일 때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그 결론은 아마도 실효성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귀국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이런 저런 일 있던 것도 얼마 전이고, 상황이 그냥 힘들 수밖에 없는 거라며 당분간은 잘 먹고 잘 자는 것에 집중하라는 타인의 이야기에는, '굳이?' 하며 반감부터 들었고 애초에 듣지도 않았다. 이렇게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아무 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탁해진 머리에 환기가 들게 한 것은 뜬금없게도 H의 '사주 이야기'.
"너가 8월이 대운이 안 좋아서 그래. 일단은 몸 사리고 가만히 버티기만 해."
이해할 수 없는 한자의 조합을 캡처해서 보내주며 이것이 나에 대한 인생 대운이라고 덧붙이는 H의 행동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어이없는 웃음이 나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 다른 타인과 정확히 같은 말을 해줬는데, 이상하게 H의 말은 완전히 와 닿았다. 본인에게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부정적인 외적 상황을 이해할 명분으로 '사주'라는 tool을 선택했던 H. 독학으로 공부 한 지 어언 6여 년이 다 되어가는 H는 최근 사주 보고 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주를 반 믿고 반 안 믿지만 듣는걸 재밌어하는 나는 나.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떤 이유인지 나는 즉시 타로카드를 주문했다.
자세히 공부해서 점 쳐볼 생각은 없었다. 이야기가 필요했다. 내 의지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다지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의 예언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밑져야 본전 치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카드를 열자마자 H에게 전화를 걸어 너의 타로를 봐주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개소리가 주전공인 나는 설명서도 없이 작업을 시작했다.
"자, 봐봐. 첫 번째 카드에 위에 로마자 숫자 11보이지? 너가 내일 그즈음 일어날 거야. 그래서 저기 별 모양 금 동전 같은 거 있지? 씨리얼이야. 내일 아침 일어나서 씨리얼 요거트에 타 먹고 하루를 시작할 거지. 그리고 두 번째 카드 봐봐. 13시에 (8인데 잘못 읽음..) 넌 이제 일터 가 있을 때인데, 같이 일하는 애들 보고 답답해 죽을 지경이야. 눈을 가리고 귀를 듣고 그저 너를 감옥에 가두고 싶은 심경일 거야... 바로 뛰쳐나오지. 술을 마시러 가는 거야. 한잔, 두 잔... 여덟 잔을 비우고 달빛이 비추어주는 그 길을 따라서 터벅터벅 집에 돌아가는 하루야. 그게 세 번째 카드지. 근데 저 달의 눈빛을 봐. 너를 가여워하고 너를 지켜주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이야. 그러니까 너는 그 달빛의 보호를 받으며 아마 꿀잠을 자게 될 거야. 결과적으로 좋은 하루의 마무리지."
되도 않는 나의 지껄임에 그저 깔깔 웃어넘겼지만, 내가 타로를 가져보고 싶은 의도는 정확히 이것이었다. 되도 않는 점괘로 내 하루의 이야기를 미리 지어보고 적어도 그 하루 동안은 그 이야기와 연결 지어서 살아가는 것. 그날의 콘텐츠. 다음날 아침, 전날 H에게 지껄였던 것처럼, 나는 내 점괘를 봐볼 요량으로 카드 세 개를 뽑아 들었다. 순간 놀랐다. 아무런 개소리도 지껄이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무속인이 남들의 앞날을 점치고 예언하지만 정작 자신의 점은 감정이 개입되어 볼 수가 없다는 어디선가 들은 그 말이 번쩍 떠올랐다. 나에게 나 자신은 감정이 개입된 아주 주관적인 존재이며, 그저 타인의 시선으로 가볍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걸까. 메타인지가 나름 확립되었다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자부'했던 내 믿음은 '자만'이었다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구매 의도를 달성할 수 없음을 하루아침에 깨닫고 애물단지가 될지 말지 기로에 서게 된 저 타로카드의 운명은 어디로 갈까.
결과적으로 그 책은 좋은 책이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 책을 끝마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아직도 그 영향권에 있는 걸 보면, 적어도 현재의 나에게 공명을 일으키기는 했을 것 같다. 십 년 후에 다시 읽는 기회가 온다면, '뭔 이런 소설에 그런 큰 영향을 받고 그랬대? 참 어렸다, 과거의 나.'라고 따분하게 넘길지도 모를 일이다. 여느 이야기가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