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같은 일상에서도 어떻게든 우아함을 지키려는 노력
오늘도 알몸으로 뛰쳐나왔다. 그나마 물이라도 아직 안 묻혔던 게 차라리 나았다. 어제는 긴 머리카락에서 뚝뚝 흐르는 물을 어떻게든 쥐어짜며 뛰쳐나왔고, 그저께는 몸을 헹구던 와중에 뛰쳐나오다 덜 닦인 비누 거품에 미끄러져서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 전 날도, 그 지난 주를 돌이켜봐도 거의 매일을 씻다 말고 알몸으로 뛰쳐나왔다.
꼬박 하루 24시간, 365일 쉬는 날 없는 풀 근무. 언제 어느 때에 호출이 올 지 모르는 대기조. 식사 시간, 휴식 시간은 따로 없고 눈치껏 알아서 챙길 것. 용무는 최대한 빨리 처리할 것. 어쩌다보니 밥은 마시듯이 먹고 쪽잠을 잔다. 거기다 무급. 21세기에 이런 직장이 있다면 진작 고용노동부, 아니 경찰에 신고를 하고도 남았다.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육아'라는 제 2의 일상은 그 어떤 최소한의 기본권조차도 보장되지 않은 날것의 세계였던 것이다.
터울 많은 동생 덕분에 육아의 상당 부분을 체험했(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제서야 그것이 튜토리얼이라 하기에도 난이도가 한참 모자랐음을 깨달았다. -엄마는 말씀하셨지. 인생은 실전이야!- 그 시절에 엄마를 돕는다고 동생 밥 먹이기, 기저귀 갈아주기, 놀아주기 정도만 했는데도 진이 빠지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동생의 절반은 내가 키운 거라면서 생색 아닌 생색을 냈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내 자식 육아는 과연 '진짜'였다.
"육아는 오늘이 제일 힘들지만, 실은 내일이 더 힘들다"는 말은 누가 했을까? 누구긴, 바로 내가 요즘 매일같이 하는 말이다. 신생아 시절에는 분유를 먹는 족족 게워내는 통에 하루에도 빨래를 두세 번 해야했고, 뒤집기를 시작할 무렵에는 용을 쓰다가도 자꾸 울어서 잠시라도 눈을 못 뗐다. 기어다니면서는 온갖 물건을 다 집어보고 싶어해서, 집 안 어디든 올라가려고 해서 다칠까봐 옆에 꼭 붙어있어야만 했다. 오늘은 오늘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지만 그렇다고 내일 할 만 해지는 것도 아닌, 날마다 새로운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어 익숙해질 틈이 없는 육아.
아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몇 가지 다짐을 했고, 그 중에서 절대적으로 지키겠다고 한 게 바로 '5초 룰'이다. 아기가 울면 모든 것을 멈추고 5초 안에 아기에게 반응할 것. 말을 배우기 전까지, 아기의 유일한 생존 수단은 울음 뿐이다. 배가 고픈 것도, 기저귀가 축축한 것도, 덥거나 혹은 춥다, 뜨겁거나 차갑다 등의 모든 종류의 불편함과 고통을 울음으로써 표현한다. 그러니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거든 무조건 5초 안에, 그러니까 바로 아기의 불편과 고통을 찾아내서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약속이다. 말 그대로 무지의 상태인 아기의 입장에서는 먹고 자고 싸는 행위 자체가 생존과 직결되니 매 순간 필사적이다. 온 힘을 다해 울 수 밖에. 내가 밥을 먹는 중인지 한창 목욕을 하고 있는 와중인지 따위는 알 수도 없고 안중에도 없다. 울면 바로 달려가야지. 아기의 기본권은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라 양육자의 기본권보다 늘 우선 순위에 있다.
이제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이렌처럼 귀에 내리꽂힐 지경이다. 어느덧 돌쟁이가 된 아기는 제 눈앞에서 잠깐만 사라져도 집이 떠나가라 서럽게 목놓아 운다. 그러니 별 수 없다. 5초 안에 뛰쳐 나갈 수밖에.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쩌다 조금 울려도 괜찮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굳이 어렵게 키우지 말라는 참견도 듣는다. 그래도 내가 굳이 불편을 감수하는 까닭은 여전히 나의 기본권보다 아기의 기본권이 먼저라서다. 말문이 트이고 "알았어, 그럼 잠깐 기다려 줄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도, 아직은 아기가 나의 '잠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곤히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후다닥 씻을래도, 블루투스 페어링이 해제되기라도 한듯 금방 알아채고 우는 아기를 어쩌면 좋나. 가끔은 지치고 어쩌다 서글퍼질 때도 있다. 기본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항상 괜찮아질 이유까지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이렇게 해서 좋은 엄마가 되려는게 아니다. 단지 그동안 내 스스로 생각해 온 '엄마로서 마땅히 해주어야 할 부분' 중에 고작 하나일 뿐이다. 매일 사이렌이 울려대는 전쟁이나 다름없는 일상 속에서 이 또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라며 초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순간 순간 좋지 않은 감정이 차오를 때 그것이 아기에게로 넘쳐 흐르지 않게 해야 한다. 나와 엄마로서의 나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냄으로써 나는 스스로의 우아함을 지킨다. 그것이 나쁜 감정을 넘치지 않게 막고 천천히 수위를 조절해주는 댐이 되어준다.
눈꺼풀도 제 힘으로 들어올리지 못하던 작고 빨갛던 아기는 벌써 제 발로 서서 한 발짝 두 발짝을 딛을 수 있을만큼 자랐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시퍼렇게 무릎이 멍든다거나, 새벽 내내 안고 달래느라 꼬박 잠을 설쳐도 나의 고충은 절대 아기 탓이 아니다. 육아의 고충은 아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상황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의 일부일 뿐이다. 모든 상황을 제쳐두고 우는 아기를 먼저 살피는 이유도 내 기준을 아기에게 갖다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배가 고파도 조금 참을 수 있고 땀에 절어도 나중에 씻을 수 있지만, 그것들은 아기가 아직 배우지 못한 것들이고 아직 배울 시기도 되지 않은 것들이다. 아기는 언젠가 기다림과 좌절을 경험하고 배우게 되겠지만 지금 그런 것들을 배우기엔 아직 한참 이르고, 또한 나로부터 처음으로 배우게 하고 싶지도 않다.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아기가 자라는 동안을 묵묵히 지켜주는 일이다.
그러니 별 수 있나. 그 때까지는 알몸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일상을 기록한 글입니다만 위 글에는 주제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많습니다. 아기의 아빠는 엄마 못지않게 양육자 역할에 충실하며 온몸이 부서져라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파심에 덧붙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