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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 베로 Jan 10. 2024

어울린다

너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멍한 시간이 어울린다. 

아무것도 없는 시간 사이 어느 과거를 어느 꿈을 만들고 있다.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하고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너는 그가 롱코트를 입고 찾아와 어울린다 생각한다.

그에게 한 입 먹은 주먹밥을 주며 내가 먹지 말고 온 것을 줄껄 속으로 아쉬워한다. 


너는 그보다 부족하다 생각하는 내가 어울렸다. 

지난 밤에도 그런 꿈을 꾸고 머리가 멍하다. 

왜 멍하게 그런 시간을 떠올릴까. 아니 왜 그런 시간을 새로 짓고 있을까


너에게는 월미도의 디스코팡팡이 어울린다. 

마냥 방방뜨고 좋아하고 요리조리 교묘하게 잘 뛰어넘는 재주

괜찮다면 활기 넘치는 웃음을 띠고 자유롭게 발랄했다.


지금은 금새 근육 여기저기가 쿵쾅 뻐근하여 다시 멍해지지만 

내가 그리 설레였던 디스코팡팡은 기억의 심장처럼 생각하면 쿵쾅거린다.


너에게는 흐드러진 코스모스길 사이 제멋대로 깡총거리는 아이가 어울린다. 

너에게는 미련한 기다림이 어울린다.

너에게는 다시 개운한 아침이 어울린다. 

너에게는 검푸른 바다 속으로 가라앉던 돌멩이가 어울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버린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죽으려는 사라지고 싶은 돌


너에게는 포근한 이불이 어울린다.

토닥토닥 토닥여주는 손짓과 자장가가 어울린다. 편안히 소근거리며 게임을 하고 잔잔히 즐거워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어울린다. 

너에게는 외투를 잘 챙겨입고 혼자 길을 나서는 뒷모습이 어울린다. 모자, 목도리, 장갑, 잠바, 바지, 두툼한 신발 알뜰히 챙겨입고 하얀 눈밭, 바람을 맞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서는 모습이 어울린다. 

너에게는 한 걸음이 어울린다. 불안과 회피를 건너 한 걸음 내딛고 나아가는 모습이 어울린다. 

잘하지 못해도 머리가 하얘져도 내 속도로 걸어가는 너가 어울린다. 

나에게는 오지 않은 날들이 어울린다. 또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거나 웃고 있겠지

가만히 조금씩 자라나는 이파리가 아직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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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시인의 시 '어울린다'를 읽고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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