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몽골 #12
늑대는 몽골사람들의 토템
몽골사람들은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사이에서 태어났다.
몽골 말로 ‘천’이라 불리는 늑대는 몽골 사람들에게 신성시 된다. 늑대의 용맹함과 영민함은 몽골 사람들의 습속에 배어 있다.
거친 황야에서 살아남으려면 늑대처럼 강하여야 한다고 믿는 몽골 사람들에게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 것은 선악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는다. 여자를 강제로 빼앗아 오는 약탈혼의 풍속도 그러하다. 우리의 보쌈이 이 약탈혼의 흔적이라 한다. 흑달사략에 기록된 몽골군의 전술도 늑대가 양떼를 습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적진의 가운데를 만곡도(彎曲刀)를 든 기마병이 바람처럼 헤집고 들어가 적을 분렬시켜 유린하는 전술은 늑대를 방불케 한다.
몽골 사람들은 늑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행 중에 늑대를 쫓은 적이 있다. 고르왕 사이흥 산을 넘어 어두운 밤길을 달리자니, 갑자기 운전사가 핸들을 꺾는다. 차는 무어라 말을 건넬 틈도 없이, 토끼를 본 독수리처럼, 돈을 본 한국인처럼 맹렬한 속도로 무언가를 쫓기 시작했다. 굉음을 울리고, 술 취한 것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리던 차가 한참을 헐떡거리다가 멈춘 뒤에야 운전사는 아쉽다는 듯이 자신이 쫓은 것이 '천'(늑대)이라고 했다. 차로 몰아서 늑대를 치어 잡는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성시 여기는 늑대를 차로 짓밟으려는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몽골 사람에게 늑대는 말굽자석이 쇠를 쫓듯, 지남철이 남북을 가리키듯 생각 이전의 본능에 가까웠다. 스스로를 푸른 늑대의 후손이라고 칭했던 칭기즈칸의 자손들이 어째서 늑대를 보면 철천지원수처럼 죽이려 안달이란 말인가. 가축을 지키려는 실리적인 목적을 넘어 그것은 일종의 매혹에 가까워 보였다. 몽골인들은 늑대를 신성시여기며 숭앙하면서, 그것을 잡아 자신과 일체시키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이 얼마나 처절한 짝사랑이란 말인가.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대상을 죽여야 하는 이 모순이 또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지도 몰랐다.
몽골 사람들은 늑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그러니 늑대를 잡으면 그야말로 행복이 굴러 들어오는 셈이다. 늑대 가죽으로 아이를 담는 요람을 만드는데, 그리 하면 늑대의 영혼이 사악한 기운들을 막아준다고 한다. 늑대를 잡아 가죽으로 모자나 옷도 짓고, 이빨로 장신구를 만드는 것도 결국 신성한 늑대의 영혼이 자신에게 들어오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는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자신이 죽인 적장 테무친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에게 붙인 의식과 비슷하다.
항복하면 관용을 베풀지만, 저항하면 몰살시키는 잔혹한 전술도 늑대의 야수성을 연상시킨다. 칭기즈칸이 남긴 어록을 보면 그러한 잔혹함을 엿볼 수 있다.
쾌락이란, 배신자와 적들을 죽이고, 그들이 지닌 재산을 빼앗으며, 그들의 종과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얼룩지고, 그들이 아끼던 말을 빼앗아 타고, 그들이 아끼던 처첩과 딸의 배를 침대 삼아 깔고 누워서 그 붉은 입술을 빠는 데에 있다. (빌릭 30조)
늑대를 가까이에서 만난 것은 우브르 항가이의 체체를렉으로 가던 길에서였다. 차는 수렁에 빠져 꼼짝도 못하고, 간간히 뿌리는 비로 날은 이르게 저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야영을 해야 할 상황에 기다렸다는 듯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불과 백여 미터쯤 떨어진 숲에서 처음에는 한 마리가 울더니, 이어서 떼를 지어 울었다. 늑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울음소리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다행히 밤이 깊기 전에 구난차가 와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떼를 지어 우는 늑대의 울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했다.
테르힝차강노르의 여행자 캠프에서 늑대 새끼를 본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는데, 몽골 아저씨 둘이서 개 두 마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심히 보고 지나치려는데 줄로 매어 놓은 개의 생김새가 심상치 않았다. 오륙 개월쯤 되어 보이는 개의 모습은 위로 짝 찢어진 눈꼬리며, 여우처럼 길게 내민 주둥이, 그리고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말아 넣고 주변을 힐끔거리며 살피는 눈빛이 섬뜩했다. 다가가 물어보니 늑대 새끼라고 했다. 늑대 새끼들은 사람을 보자 눈을 힐끔거리며 몸을 피했다. 그런데 몽골 개가 다가가자 꼬리를 치며 다정하게 장난을 친다. 덩치가 훨씬 큰 몽골 개는 늑대 새끼를 체구로 눌러 일방적으로 놀려댄다. 개에게 깔려 낑낑거리는 꼴이 아무리 새끼라 해도 늑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몽골 개가 제 먹이 쪽으로 다가가자 조금 전까지 다정하게 장난을 치던 늑대 새끼들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몽골 개도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먹이는 양의 내장과 시뻘건 선지피였다.
늑대는 바위가 있는 언덕이나 산을 낀 초원에 산다고 한다. 낮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밤에 활동하는데, 가축의 피해를 막기 위해 유목민들은 늑대를 일정한 주기로 사냥을 한다. 늑대 사냥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10월 15일경부터 시작되어 2월 15일까지 한다. 늑대를 사냥할 때에는 암컷을 먼저 죽인다 한다. 가족을 포기하지 않는 수컷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그 다음에 쉽게 잡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냥으로 죽인 늑대는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 걸어둔다. 늑대가 되살아나는 것을 막기 위한 미신이란다. 때로는 늑대 새끼들을 잡아다가 기르기도 하고, 개와 접을 붙여 ‘늑대개’가 태어나기도 한다.
항가이 산을 넘다가 길을 잃어 하루 묵은 유목민 게르의 앞마당에는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막대기에 사람의 웃옷을 입혀 놓은 허수아비는 밤에 게르 부근에 나타나는 늑대들을 쫓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요즘은 늑대가 사람을 무서워해 보기만 하면 달아나고, 사람들은 늑대를 보기만 하면 쫓아간다니 그 처지가 안쓰럽기만 하다. 겨울철에는 늑대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 패키지도 있다 한다. 영하 40도의 혹한에 발 끊긴 관광객을 불러들이기 위해 '늑대 사냥'을 내세우는 안간힘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전성태의 소설「늑대」에 등장하는 솔롱고스 사냥꾼이 '돈과 노구의 정열'로 쫓는 늑대는 지금 몽골에 번져나가는 자본의 '검은 정염'인지도 모른다. 늑대를 앞세워 달러를 벌어들이는 몽골 사람들이 자본의 견강한 송곳니가 늑대의 이빨보다 더 잔혹하고 비정한 것임을 알고 있을까.
자이승 기념탑 오르는 길에 늑대 털로 만든 모자를 오만 원 주고 산 적이 있다. 따뜻할 뿐만 아니라 목까지 내려오는 꼬리털이 풍성하여 위용이 있어 보이는 모자였다. 그것을 몇 해 동안 옷장 안에 넣어 둔 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나중에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옷장 안에 넣어 두었던 늑대 털모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옷장 안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모자테만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늑대의 혼령이 쫓아와 제 털을 몽골로 다시 데려간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모자가 있던 자리에 무언가 흰 가루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좀이었다. 좀벌레가 늑대 한 마리의 털을 몽땅 갉아 먹고 가루만 남겨 둔 것이다. 늦게나마 좀의 먹이가 된 늑대의 영혼에게 사과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