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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노스 최민호 May 11. 2019

세렌디피티(Serendipity)      

세렌디피티(Serendipity)   


[제 1편]

  

1.     


분홍빛 꽃잎이 눈처럼 하늘에서 내린다. 꽃잎이 땅에 쌓여갔다. 녹지 않는 눈이었다. 주변이 온통 꽃향기였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꽃잎을 뭉쳐 보았다. 떡처럼 뭉쳐졌다. 꽃잎 떡을 땅에 굴려 부풀렸다. 눈사람을 만들었다. 얼굴을 그려 넣어야지. 

그 사람의 얼굴...그 남자의 얼굴....

눈썹으로 붙일 작은 가지를 찾으러 꽃잎 내리는 눈 속을 거닐고 있을 때 꿈이 깨고 말았다.

핸드폰 알람소리 때문이었다.        


‘....그냥 그냥 나의 느낌으로

온 세상이 어제완 달라

그냥 그냥 너의 기쁨으로

네가 날 불렀을 때 나는 너의 꽃으로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 시리도록 펴....’     


알람소리의 멜로디가 환청같기만 하다. 아직도 부드러운 꽃잎의 촉감이 손 안에 가득하다. 그 향기... 이것도 환각이었나? 그 사람은? 그 얼굴도 환형이었을까? 아직도 아련하다. 가슴이 작은 파장으로 아려온다. BTS의 멜로디 세렌디피티(Serendipity)였다.          


‘이 곡은 잠을 깨우지 않아. 더 빠지게 해.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것 같아. 아직도 만져지는 꽃잎의 감촉과 가셔지지 않는 그 향기. 잠은 깨었지만 꿈은 깨지 않았어...’     


그렇게 한참을 꿈속에서 꽃과 노래 속에서 헤맸었지...

약에 취한 것처럼, 꿈에 취한 것처럼, 몽유병자처럼...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끝내 잠을 이루지는 못했다. 꿈이 너무 진했다. 

뜬 눈으로 뒤척이다 아침 햇살이 방안을 비추자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우리 가보지 않을래?”     


친구를 유혹하여 날이 새자 달려갔던 곳. 

진해. 4월. 벚꽃.

나, 미영...          


2.     


석호.

진해 해군기지 사령부. 사령부 지원부대 기동타격 팀으로 배속받아 처음 맞아보는 군항제.

사령부 정문에서 부대까지 사열받는 노병처럼 심어져 있는 벚나무들의 간격은 꽃잎이 날릴 때 하늘의 빈틈이 안 보이도록 감안한 거리 같았다.

통근차로는 20분이지만 걸어서는 한 시간. 그 긴 거리에 줄지어 서있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비누거품처럼 꽃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저 작은 꽃잎들. 꽃잎 하나는 분홍색이지만, 바람에 날릴 때면 흰 눈이 되었다.        

군모와 어깨 위에 떨어지는 꽃잎을 나비처럼 앉혀두고 천천한 걸음으로 낙원의 꽃밭을 걸었다. 사관학교 출신 BOQ(독신장교숙소) 룸메이트와 함께였다. 


바람이 한줄기 불자 후루룩 꽃잎이 떨어졌다. 눈앞이 분홍색 안개로 가려졌다.  

군화바닥이 꽃잎으로 물들어가자, 떨어져 내리는 벚꽃과 솟아오르는 감흥 속에서 노래가 향내처럼 흘러나왔다.      

Nessun dorma! Nessun dorma!

Tu pure, o Principessa,

nella tua fredda stanza....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당신도, 공주여, 그대의 차가운 침방에서,

별을 보시오, 사랑과 희망에 전율하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아무도 잠들지 마라.)     


룸메이트는 옆에서 들려오는 투란도트의 아리아에 소리를 죽여 발걸음을 떼었다.

꽃비 내리는 가로수 속의 노래는 꽃잎들이 방음벽을 이루는 듯 더 은밀하고 진하게 귀에 전해졌다. 눈앞이 아득해진다. 

저 멀리 꽃눈을 맞으며 정문이 서 있었다.  

낙원의 문을 나서면 시작되는 유혹. 

여좌천을 따라 벚꽃터널과 함께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

지옥이 낙원보다 불행하리라는 예감은 군복을 입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망상이다. 

꽃잎이 더 많이 떨어지기에 소주잔보다는 막걸리 잔이었다. 

백색 술 위에 떨어지는 분홍색 꽃잎을 후루루 불어가며 한잔 마시고 젓가락으로 집는 고래고기 한 점. 지옥에서 맛보는 천국의 맛이었다.      

포장마차는 관광객들로 북적대었지만, 그들은 시간에 쫓겨 늘 안절부절하다. 가끔 기념으로 한 컷 찍자는 관광객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장교의 포즈를 취해주고 두 사람은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포장마차 옆자리는 자주 비워졌다. 

열흘 가는 꽃잎은 없도다. 이즈음의 BOQ는 텅텅 비워지기 일쑤다. 훈련이 계속되는 초급장교들에게 진해는 지옥이자 낙원이었다.   


바람이 한 줄기 분다. 벚꽃 잎이 눈보라처럼 휘날린다. 

그럴 때 분열이라도 하듯, 일제히 한손으로는 원피스를 부여잡고 또 한 손으로는 날아가는 모자를 부여잡는 젊은 여성 관광객들의 모습에 장교들은 BOQ를 버린다. 

내일부터 IBS훈련(기습침투훈련)이 시작된다. 천국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우유빛 막걸리에 분홍빛 꽃잎으로 물 들은 술잔을 거침없이 들기도 아까운 저녁이었다.      


“한잔 더...장 소위.”      


사관출신 박 소위가 권했다.      


“네순 도르마. 숨이 막히누만. 성악을 하는 녀석이 왜 해병대를 지원하나? 무슨 영웅이 되겠다고...”     


“.........”     


“참. 그 녀석들 입대했겠나? BTS말이야. 비틀즈보다 더 유명한 그 친구들 말이야. 소식 못 들었나?”     


“해병대 왔으면 알텐데...그 친구들 왔으면 벌써 집합시켰지. 귀여운 녀석들..”     


“녀석들...국가의 부름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게 영광이고, 남자로서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할 수 있는 기회라고? 괘씸한 녀석들... 사관학교 나온 나는 뭐가 되나. 그런 말로 세상 사람들을 두 번 놀라게 하다니...

그런 거야 자네도?”     


석호는 고개를 단호히 흔들었다. 

막걸리를 한 주전자 더 시켰다. 

훈련만 없다면 밤이 지새도록 마시건만... 새벽에 비상이 걸린다. 

아크릴 가로등이 켜지면서 벚꽃 색깔은 분홍빛이 더욱 요염해졌다.  

문득 떠오르는 무대. 조명 속에 나타나는 고혹적인 미녀... 꽃 한송이를 들고서...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춘희(椿姬). 누가 춘희를 동백꽃이라고 했나. 

저 비련의 여주인공 비올렛타야말로 한순간에 피고 진 벚꽃 아니겠나?

춘희 속의  ‘축배의 노래’가 마음속에 떠올랐다.      


‘Libiamo, libiamo ne'lieti calici

che la bellezza infiora.

(마시자, 마시자, 축배에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됐다네.

잠깐, 잠깐 동안 환락에 취하도록

마시자, 달콤한 전율 속에 사랑을 일으킨다네...’     


또 다시 바람이 불었다. 조금 더 강한 바람이었다. 꽃잎이 후루룩 술 잔 위에 떨어지면서 석호의 머리에 쓴 군모가 바람에 날아갔다.      


3.     


신미영은 꿈에 등이 밀려 찾아 왔지만 언젠가 한 번은 오고 싶었던 축제였다. 벚꽃 군항제.

오늘이 절정인 줄이야 알지 못했지만, 진해로 들어가는 터널을 나오자마자 바다가 보이면서 파란 수평선에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을 보자 미영은 어젯밤 꿈속에 빠져드는 듯 했다.      


‘오 어쩌면...!’     


아름다워서 속이 상하는 꽃이었다. 너무 짧아서 가슴 아픈 꽃이었다. 사랑하지만 고백하기 어려운 꽃...벚꽃.   

미영은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진해의 벚꽃을 생각할 때마다 일본의 사무라이가 떠올랐다. 

군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벚꽃은 해군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이 어울리는 것은 일본이었다.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국화와 칼’에 나오는 루스 베네딕트의 표현이었다. 

일본의 사무라이를 그토록 헤집어 팠던 루스 베네딕트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오고 싶었으면서도 와지지 않는 저항이 있었던 진해였다.       

춘옥은 감성이 예민하여 벚꽃제 가자면 당장 따라 나올 줄이야 알았지만, 그녀 또한 진해가 이렇게 화사한 아름다움에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듯 말을 잃고 연신 탄성만 내뿜었다.

온종일 거리마다 헤집고 다녀 벚꽃이 보이는 곳에서 저녁이라도 요기하자고 여좌천을 따라 걷던 두 아가씨는 물이 흐르는 쪽으로 벚나무가 휘어져 냇물 위에 꽃잎이 떨어지는 풍경에 눈을 빼앗겼다. 날은 맑았고, 살랑거리는 바람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포장마차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벚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였다. 

바람이...바람이 세게 불었다.   

스커트와 브라우스가 바람에 부풀어 올라 양손으로 단속할 때 그만 모자를 날리고 말았다. 꽃 문양이 있는 모자였다. 길 위에 여러 개의 모자가 바람에 구르고 있었다. 미영은 모자를 쫓아갔다. 그 때 미영 앞에서 모자를 줍는 사람이 있었다. 

건장한 남자였다.      

남자는 구르는 모자 두 개를 주웠다. 봄볕을 가리는 챙이 넓은 여성의 봄 모자와 장교 계급장이 있는 군모였다. 

그는 두 개의 모자를 줍더니 바람에 나부끼는 스커트를 부여잡고 모자를 주우러 허둥대는 젊은 여성을 싱긋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군모를 여성에게 건네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장마차 안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미영은 황당한 마음에 군모를 손에 들고 포장마차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이없게도 여성의 꽃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그가 앉아 있었다.       


‘무례하게도...감히...’     


순간 거부감이 울컥 솟았다. 군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해병대라면 더욱...

그 중의 한 군인이 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제 모자...”     


심술궂게 자신의 모자를 쓰고 있는 장교에게 미영이 소위 계급장이 달린 팔각모를 내밀며 말했다.      


“돌려주세요.”     


수줍은 여성의 작고 단호한 말을 듣자 석호가 말했다.       


“저와 축배를 한잔 드신다면...”     


아. 이게 무슨 일인가. 경쾌하고 선명하면서도 선이 굵은 이 목소리. 

목소리만으로 순간 가슴이 멈추었다. 멋진 목소리였다.  

미영이 엉거주춤 서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컬러링 소리가 울리자마자 미영은 전화를 귀에 댔다.       


“너 어디 있니? 모자 찾았어?”     


춘옥이였다.      


“응...여기...근데 잠깐 좀 와 봐...글쎄...”     


전화를 끊자, 소위가 말했다.      


“컬러링이 저하고 같군요..세렌디피티...”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컬러링을 켰다. 조금 전과 같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미영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저 미소. 눈이 부신듯 했다.   

지금 녀석이 작업을 걸고 있다.... 가슴 두근거리게 멋진 목소리에, 건장한 체격의, 소년의 웃음이 입가에 걸린 영화배우 현빈이 나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 

춘옥이 들어섰다. 

눈매가 팽팽해진 춘옥을 슬그머니 손으로 찔러 진정시키고 미영이 말했다.     


“딱 한잔이예요.”     


춘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드러나지 않게 눈을 흘기며 미영을 바라보았다.     


“서서 축배를 드실까요? 아니면 앉아서?”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더 이상스러울 것 같았다. 미영은 간격을 두고 석호 옆에 앉았다.

미영이 자리에 앉자 석호가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Libiamo, libiamo ne'lieti calici

che la bellezza infiora.

(마시자, 마시자, 축배에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됐다네...)”     


작은 폭포처럼 시원하고 맑고 흘러나오는 노래는 방금까지 석호가 마음속에 읇조렸던 감흥의  가사였다. 이번에는 춘옥의 눈이 가늘게 홀려졌다.

여좌천의 막걸리가 한 주전자 더 주문되었다. 

노래가 끝나자 네 사람은 축배를 위해 막걸리 잔을 들었다.      


“꽃잎을 위하여! 아름다운 밤을 위하여! 추억을 위하여! 축배!”     


다시 바람이 우수수 불었다. 술잔위에 벚꽃잎들이 후루룩 떨어졌다. 

미영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감동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예감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 모금씩 베어 마시던 막걸리를 미영과 춘옥은 어느 사이엔가 건배를 외치며 단숨에 들이켰다. 노래 소리, 말소리, 술잔 부딪치는 소리...


왕래하는 관광객들의 발걸음 소리가 잦아들 즈음 주변의 어둠은 짙어져가고 가로등 불빛은 자신이 서있는 자리만 갈수록 밝아져갔다. 

술 자리를 일어선 것은 사관생도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꽃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다른 꽃이 없는 곳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석호가 잔잔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날에 이렇게 좋은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름 바다위에 배가 미끄러지는 듯한 석호의 목소리를 따라 세 사람은 콧노래로 합창을 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BOQ였다. 축제기간의 BOQ는 한산하기만 했다.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장교들은 거의 없었다. 훈훈한 봄바람은 꽃잎과 함께 장교들의 군모마저 모두 날려 버린 듯 했다. 

정문을 들어서자 하루 종일 이어진 탄성이 또 터져 나왔다. 드문드문 놓여있는 벤치마다 꽃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금녀의 집’     


독신 장교숙소에는 여성은 일체 출입이 금지되지만 축제기간만은 예외였다.

BOQ는 꽃이 없는 꽃밭이었다. BOQ경내의 벚꽃은 그만큼 비경이었다.  


4.      


새벽 6시.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세렌디피티... 몽환속의 무의식으로 알람을 멈춘 후 눈을 떴다. 주위를 둘려보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보이는 것은 사각형뿐이었다. 흰색의 사각형. 

네 변의 직선을 수직으로 내려온 곳에 보이는 사각형의 책상과 캐비넷. 흰색의 시트와 침대.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 입원실의 한 장면이었지만, 링겔병의 스탠드 대신 보이는 것은 벽에 반듯이 걸려 있는 각이 진 군복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른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벚꽃이 눈부시게 피어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BOQ였다.

미영은 옷매무새를 다듬어 보았다.      


‘내가 여기서 자다니...’     


어젯밤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BOQ로 들어와 벤치에 앉아 석호의 어깨에 목을 기댔던 기억이 났다. 자꾸 힘이 빠져나가서였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미영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다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각. 모든 것이 사각형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비품은 책상과 캐비넷과 침대 뿐, 그리고 책상위에 책 몇 권과 작은 액자 하나. 간단했다. 

미영은 액자를 들여다보았다. 조명이 스포트라이트로 비치는 무대 위에서 턱시도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목에 힘줄이 튀어나온 채 입을 벌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진이었다. 석호였다. 짐작했듯이 석호는 성악가였다. 그 공연장면이듯 했다.

그리고 그 옆에 하얀색의 편지 봉투가 놓여있었다.     


‘신미영씨에게’     


봉투의 앞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영은 봉투를 열어 그 속의 종이를 펼쳐 보았다.      


‘IBS. 010-......’     


무슨 뜻인지 모를 메모와 전화번호를 남기고 석호는 사라지고 없었다. 

미영은 핸드폰을 더듬어 단축번호를 눌렀다. 한참을 신호가 간 뒤에 춘옥이 나왔다. 춘옥은 미영라는 것을 알자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얘 미친 것아. 지금 너 어딨냐?”     


미영은 도무지 상황정리가 되지 않았다. 춘옥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된 거니? 너는 어디 있냐? 어젯밤 어떻게 된거야...?”     


“이 정신 없는 것 좀 봐. 너 지금 어딨냐고? 어디서 잤어?”     


“나? 몰라. 혼자야. 입원실 같은 방이야. 그 사람 방인 것 같아...”     


“뭐. 그 사람? 너 그녀석하고 잔거야? 그 녀석에게?...”     


춘옥이 묻는 말을 알 수 있었다. 미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아무튼 혼자 있어. 너는 어디니?”     


“서울이지. 어제 네가 없어져서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기집애야? 전화도 안받고...찾다가 혼자 왔잖니? 얼마

나 걱정했다고...어떻게 된 거야!”     


춘옥의 속사포 같은 말을 들으면서 상황을 재조합해 보았다.

어제 저녁. 자신이 그토록 취한 줄을 몰랐다. 필름이 끊겨버렸다. 칼러로 시작된 필름이 BOQ가 뭔가 하는 장면에서부터 흑백으로 바뀌었다. 하얀 벤치와 흰 벚꽃만이 기억 속에 정지되어 멈춘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미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석호가 BOQ 구경시켜준다고 해서 따라 나섰고... 춘옥은 화장실 간다고 어디론가 없어졌고...그리고 는 기억이 없다. 

춘옥은 화장실 다녀와서 미영을 찾으려고 전화를 몇 번이나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사관학교 장교도 취하여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춘옥은 한참을 헤매다 BOQ를 나와 택시를 불러 진해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했다. 벚꽃제 중에 운행하는 야간 특별열차였다. 미영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친구를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BOQ에서 생면부지의 술 취한 장교 옆에  같이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미영이 무사하기만을 빌며 정신없이 올라와 미영을 걱정하고 있는 참이었다고 했다.     


미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황이 재생되는 것 같았다. 리와인드 되는 필름을 눈을 감고 리뷰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또렷이 들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미영은 으스스 추워졌다. 

낭패감...오물 통 속에 빠진 듯한 역겨움...

춘옥이 자신에게 상상하고 있을 그런 느낌. 

그런데 아니었다.

침대 담요를 끌어 무릎을 덮었다. 

석호. 침대 시트에서 석호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젯밤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석호의 품속에서 숨 막히던 아득함. 그의 단단한 어깨에 갇혀 손끝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의 체취에 마취된 양 호흡을 멈추었다. 

심연 속에 빠져 몸부림치면서도 햇빛을 향해 솟구치던 온 몸.     

처음이지만 황홀했다. 이 느낌을 찾아 그에게 기대었던가? 그의 목소리에 청각이 마비되어서?...

미영은 다시 얼굴이 혼자 붉어졌다. 그가 남긴 종이 쪽지를 보았다.      


‘IBS...’     


‘무슨 뜻일까?’     


미영은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핸드백에 넣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숙소의 장교들에게 들리지 않게 발소리를 죽여 BOQ를 빠져 나왔다.     


5.       


“지금부터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적에게 박살난다. 누구야! 지금 눈알 굴리는 놈이. 중대장이  자갈 굴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말을 못하겠잖아! 시선고정! 복창!”     


“시선고정. 시선고정...”     


새벽 3시 30분. 해안가의 새벽 바람은 봄 바람이 아니었다. 슈트복을 입지 않았다면 바닷 속은 얼어죽을 만큼 차갑다. 벌써 얼마동안인가. 몸을 녹이고 풀기 위해 모래사장위에서 계속되는 피티 체조에 이미 발은 모랫덩이에 범벅이 되었다. 슈트복 속에서 땀이 온몸을 흐르고, 숨이 턱에 닿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파 눈에 살기가 번뜩일 때, 중대장이 외마디로 외쳤다.      


“중대, 진수!”     


대원들은 일제히 IBS를 머리에 이고 바다 속으로 내달렸다.

13명이 한 팀이 되어 120킬로에 달하는 무거운 고무보트가 바닷물에 닿자 일제히 보트 위로 올라타는 대원들. 숙달될 대로 숙달된 대원들이다. 

어깨에 X자로 멘 K-2자동소총 멜빵을 조여 몸에 단단히 붙인다.      


“소대. 앞대원은 전방주시, 나머지는 사주경계 실시!”     


석호는 볼륨은 최대한 줄이되, 파장은 멀리가게 목소리에 쇳소리를 담아 휘파람 소리처럼 소대원에게 명령했다.     

일단 여기서는 모터를 켜서 최대한 속도를 높힌다. 그러나 곧 소리를 죽여 노를 저어 접근 할 지점이 나온다. 

경계 정찰대...

장석호 소위가 맡은 임무다. 중대 IBS 대열의 맨 선두에서 경계와 정찰을 담당하는 조다. 가장 위험한 임무이지만, 가장 중요하다. 

석호는 계급장 없는 나카오리 모자 끈을 턱에 바짝 조였다. 바람이 생각보다 강했다.

대원들 모두 소리를 죽이고 사주경계하며 긴장의 끈을 조일 때, 옆에 있는 통신병이 석호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소대장님. 적 경계에 침투하였습니다. 모터를 끄랍니다.”     


지체없이 수신호로 대원들에게 지시하곤, 소리 없이 노를 바닷물 속에 넣고 저어가면서 석호는 바람과 파도가 생각보다 강한 것을 느꼈다. 예정 시간보다 빨리 목표지점에 도착할 것 같다. 나쁠 것은 없었다. 대원들의 고생도 그만큼 덜해질 것이다.

대원들의 숨죽인 노 젓는 소리와 파도와 바람소리만 들리는 긴장감 속에서 잠깐 어젯밤이 떠올랐다.      


신미영이라 했지...그 부드러움과 깜찍함.

매력이 넘쳤다. 수줍어 하면서도 대담한, 그러면서도 격을 잃지 않는 지성미...

훈련을 위한 비상 연락이 오면서 다시 한 번 들여다 본 그녀의 얼굴. 처음 보았지만 처음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사랑스러움이 왈칵 치밀어 올라, 이마에 입술을 대는 작별인사를 하고 부대로 들어왔다.      

그녀가 IBS라 한들 알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군사기밀이었다. 해병대만이 하는 상륙기습 훈련. 적진 깊숙이 고무보트(IBS)를 타고 기습적으로 침투하여 적을 소탕하고 귀대하는 훈련이다. 고도의 정신력과 긴장감 아울러 강인함이 요구되는 훈련이다. 그 자체가 기밀사항이다. 얼굴을 위장 색으로 칠하고, 적에게 생포되어도 계급을 알 수 없도록 계급장도 이름도 없는 슈트복과 챙이 넓은 천으로 만든 나카오리 모자를 쓴다. 철모가 아니다. 바다 속에서 잠수를 하여 해안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성공률은 8:1이다. 8명이 상륙하면 1명만이 생존하다는 뜻이다.

주기적으로 예고없이 훈련은 실시된다. 다만 영외거주를 하는 장교들만이 하루 전에 통보받는다.      


그녀가 전화를 할까? 핸드폰은 모두 부대에 반납했는지라, 훈련이 끝날 때까지 통화는 불가능하다. 

그녀가 기억할까? 술과 벚꽃과 분위기에 취해 노래를 계속하면서 왜 내가 해병대를 지원했는지 속삭였던 말을? 하늘이 주신 미성을 가진 테너가수가?

차디찬 바닷물에 온 몸을 적셔도 그녀의 체취가 아련히 남아있는 듯만 하다. 그녀와의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위험하다. 잠시라도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된다. 

훈련에서 땀 한 방울이 전장에서 피 한 방울이라는 말. 

장석호 소위는 상념을 떨쳐버리듯 고개를 흔들고는 전방을 주시했다. 앞은 여전히 칠흑이다. 손을 내밀어도 내 손이 보이지 않는다. 달이 없는 무광의 그믐날 밤. 기습침투는 그때가 적기였다. 적도 아군도 마찬가지다. 석호는 손목의 야광시계를 본다. 새벽 4시 10분전. 

목표지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류가 셌다. 보트는 잘 나가고 있었다. 이제 저 앞에 해안이 보이면서 목표지점이 나타날 것이다. 

노를 바다 속으로 밀어 넣어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상륙할 해안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석호는 후미에 있는 중대장에게 무전기로 연락했다.       


“경계정찰조입니다. 전방 이상무. 앞으로 5분 후에 상륙하여 정찰 후 보고하겠습니다. 이상.”     


“오케이. 조심하라.”      


장석호 소위와 대원들은 해안이 노 끝에 바닥이 닿기 시작하자, 소대장의 수신호에 따라 대원들은 일제히 보트 아래로 잠수하기 시작하였다. 탄창을 장전한 소총을 손에 감아 보트위에 얹고, 보트 밑에 들어가 머리에 인 채 수영을 하여 보트를 이동시켰다. 

해안 건너편에는 아군의 초소가 있다. 해병사단에서 지키는 해안방어 초소이다. 상륙하여 그들 초소까지 진격하여 점을 찍고 오는 것이 오늘의 훈련 과업이었다. 

석호는 통신병과 함께 보트를 소리 없이 해안에 접안시킨 후 몸을 굽혀 사주경계를 하면서 해안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해안초소가 하늘을 배경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접근하여 초소를 확인한 후 중대장에게 보고하면 곧 중대 본대가 상륙을 실시할 것이다. 정찰조의  임무였다. 훈련은 순조로웠다.      


“통신병!” 


통신병이 다가왔다. 석호가 무전기 수화기를 귀에 댔다. 중대장에게 보고하려는 순간이었다.

그 때였다. 전방 초소에서 불이 번쩍하는 섬광이 일면서 벼락이 치는 천둥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갑자기 세상이 섬광과 총포의 굉음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통신병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김해병!”     


“소대장님. 이상합니다. 소대장님.”     


김해병의 가슴팍에서 검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어둠속이라 보이지 않았지만, 곧 초소에서 뿜어대는 화포의 불빛에 피가 김해병의 온 몸을 적시는 것을 선연히 볼 수 있었다.      


“김해병!”     


다시 외치는 순간, 허벅지가 뜨끔했다. 석호는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전원 포복.”     


그러나 작렬하는 총소리와 포소리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총알은 씽씽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날았다. 크레모아가 터지고 수류탄도 던져졌다. 연사되는 소리는 M60 기관총 소리였다.

간간히 K1 소총소리도 연달아 들렸다. 

해안은 삽시간에 피와 대원들의 신음소리로 뒤덮였겠지만, 총포소리에 그런 소리도, 모습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석호는 멀리 바다 위 중대 본대를 바라보았다. 중대장이 있을 보트위에서 플래시가 공중을 몇바퀴 돌며 휘저었다.      


“우리 해병대 훈련중이다!”     


분명 해안초소에 소리치는 것이었겠지만, 그 소리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위험했다. 예광총알 수십발이 플래시 불빛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플래시가 꺼졌다. 무슨 신호나 외친다는 것은 더 위험을 자초했다. 

대원들이 모래바닥에 엎드려 K2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포복 자세로 응사하려는 것이었다. IBS훈련은 실전과 동일하게 한다. 대원들에게 실탄은 이미 지급되어 장전되어 있었다.  

석호는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대기. 사격금지. 초소는 아군이다. 사격하면 안된다. 대원들 전원 잠수!”      


대원들은 어둠속에서 솟아오르는 조명탄을 보면서 총을 메고 신속히 보트를 이고 바닷속으로 잠수했다. 귀신 같이 빠른 동작이었다. 이를 갈면서 덜덜 떨며 수색훈련에서 수없이 반복한 잠수였다. 훈련에서의 땀 한 방울이 전장에서 피 한 방울이었다.

석호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총에 맞은 것 같다는 직감이 스쳤다. 이상스럽게 아프지는 않았다. 모래사장에 쓰러졌다. 옆에 통신병과 함께 쓰러진 대원들이 여럿 보였다. 석호는 기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때 귓가를 스치는 총알소리. 나카오리 모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 했다.

대원들은 피를 흘리며 소대장을 보았다. 소대장 옆으로 모두 기어왔다.       


“소대장님. 저는 괜찮습니다.”     


최 해병의 배에서 피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정신은 멀쩡한 것 같았다. 

석호는 대원의 최해병의 배 위에 엎어졌다. 조금이라도 지혈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지옥의 사선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총과 포화는 계속 터지고 있었다. 아군을 향해 응사할 수는 없었다. 이 쪽이 더 노출되면서 화력은 더 집중될 것이다. 

석호는 대원의 배에 엎어져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불꽃놀이 하듯 총알이 난무하며 날아들고 있었다. 작은 초소에서는 부챗살이 퍼지듯 예광탄의 불빛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불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리가 점점 아득해져가는 것 같았다. 석호는 정신을 잃었다.      


6.      


“비상 비상! 전원 출동하라. 집합장소는 중대 연병장. 

전원 비상. 전원 출동. 집합 장소는 중대 연병장!”     


BOQ의 연내 방송이 숨가쁘게 반복되었다. 장교들은 비상 스피커를 듣자 즉각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으로 뛰어 나왔다. 현관에는 장교들을 수송할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둠은 가시지 않았다. 먼동이 트면서 여명이 시작되고 있는 시간이었다.

해병대 QRF중대 연병장에는 이미 병들과 부사관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줄 앞에 손으로 휘갈겨 쓴 팻말이 줄지어 서 있었다.      


“A", "B", "O", "AB"     


혈액형이었다. 모두들 자기 혈액형 줄에 서라는 주임상사의 주문이 계속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자기 혈액형 줄에 선 장병들의 인식표를 빼앗듯이 대조하고서 의무하사는 즉각 주사를 팔에 꽂아 혈액을 채취하였다.

장병들은 모두 팔 소매를 걷으며 수군거렸다.      


“무슨 일? 무슨 일이야.”     


“몰라. 대형 사고가 터졌나봐. 피가 모자라대...수혈할 피...”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말했다.      


“IBS훈련 중에 사고가 났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지금 통합병원에 수송중인데 수혈할 피가 모자란다. 전원 협조

하기 바란다.”     


대대장이었다. 어둠속이었지만 대대장의 얼굴이 납빛처럼 창백했다. 

장석호의 룸메이트인 박기춘 소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IBS 훈련? 장석호가 새벽에 출동했는데....그럼 그 중대에서 사고?”     


피를 빼다말고 의무하사에게 물었다.      


“사망자나 부상자가 누군지 파악됐나?”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장교 한사람이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기춘 소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수혈을 끝내자마자 그는 대대 상황실로 달려갔다. 상황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했다. 상황병들이 저마다 전화통을 붙잡고 긴장된 목소리로 어느 곳과 통신하고 있었다. 

두 어깨에 별이 새겨져 있는 견장을 달고 상황판을 마주하고 있는 사단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대형사고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박소위는 상황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상자 상황. 

상황판에 기재되어 있는 이름이 망원렌즈로 줌인 되듯이 갑자기 커다란 글씨로 눈에 들어왔다.      

사상자 인원 : 총 7명

장교 1명. 해병소위 장석호.

부사관 2명. 해병하사 김석우...

병 4명. 병장 최순은...     


현재 통합병원 이송중이라 추후 생사여부는 더 밝혀지겠지만, 현장에서 즉사한 병력이 3명이라는 보고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이런 대형사고가...

어젯밤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막걸리에 벚꽃을 고명처럼 얹어 입으로 불면서 마시던 일. 난데없이 바람처럼 불어 들어온 어여쁜 아가씨 두 명. 

석호의 축배의 노래. 이어진 BOQ에서의 데이트와 로맨스. 파트너가 느닷없이 사라져 김이 빠졌지만, 장석호와 그녀는 꽃잎이 지듯 어디론가 없어졌다. 

내일 새벽이 훈련비상인데....

하지만 비상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소리없이 사라진 두 사람, 석호에 대한 시샘만이 가득했다.      


‘운도 좋은 놈...’     


그런데 일어나 보니 사고라니, 사망이라니... 

기가 막혔다. 현실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박기춘 소위는 상황실을 나왔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아침이 밝아 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터덕터덕 길을 걷고 있는 박 소위 발밑에 후두둑 벚꽃잎들이 떨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박소위는 군화발로 벚꽃잎을 짓이겨 버렸다.      


7.       


“그래 좋았니?”     


눈을 찢어지게 흘기며 춘옥은 미영을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미영은 춘옥의 눈길을 피하며 묵묵히 밥술만 옮겼다. 

뱃속이 시장했다. 팔다리도 뻐근했다. 피로했다. 그러나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졌다. 끊어졌던 필름이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어제 무엇인가를 잃었다. 중요하고 소중한 무엇이었다. 잃고 난 뒤의 허전함에 시장끼를 느꼈는지 모르겠다. 피로감 속에 상실감이 묻혀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느낌은 무엇일까. 허무함과 상실감이 밀물처럼 밀려와 가슴을 때리는 것은. 

어제 밤 그 남자와의 신기루 같은 사랑. 

스스로도 설명하기가 어려운 그 와의 만남이었다. 미영은 춘옥에게 독백하듯 말했다.      


“잃어버리는 건 나쁜 일이 아니야. 가지고 즐기는 것보다 즐겼던 기억이 더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니까. 상실을 즐겨야 해. 잃어버려야 새 것이 생겨...”     


변명인지 고백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 나를 배반하고 있었다.

미영은 궤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머어머. 얘 좀 봐. 너, 그 사람에게 반한거야 시방?”     


“몰라. 나도. 하지만 저지르고 봐야 해. 머뭇거리다가 되는 일은 없어. 세상 속의 내가 싫었거든.”     


춘옥은 미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미영의 눈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여고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두 사람이었다. 사변적이기도 했지만 모범생에 우등생이었던 미영의 모습이 하룻밤 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 했다. 


“미영아. 어제는 그랬다 치자. 근데 너 요즘 무슨 일 있었니? 잘 다니던 병원에 왜 사표를 냈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병원에서 사고라도 쳤니?”      


신 미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밥을 남김없이 먹고 나서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어느 날인가부터  내가 스스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우리는 뭐니?

남들은 좋은 직장이라고 부러워하지만, 나는 뭐니? 눈만 뜨면 환자들 신음소리에 대소변 갈아대고 팔에 주사바늘 찔러대는 게...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눈부셔서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습관이더라고...봉사, 헌신...누구를 위해?. 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돈으로 스스로를 설득하는 내가 싫었어. 차라리 내가 환자였더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어. 그래서 저지른 거야.”     


명문대 출신의 실력있는 간호사만이 선택된다는 중증외상치료센타의 수석 간호사로 일하는 신미영은 그 분야에서 신뢰와 실력이 공인되고 있었다. 연봉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간호사라면 누구라도 선망하는 자리였다. 

춘옥은 전문대학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시간은 많았지만 직업의 충실감을 따진다면 미영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미영을 만나면 에피소드와 스릴 넘치는 드라마가 매일 쏟아지는 다이내믹한 생활에 정신없이 바빠하는 모습이 은근히 부럽기까지 했던 춘옥이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직장에 사표를 냈다며 진해에 벚꽃놀이 가자는 미영의 권유에 의아스런 마음과 알 수 없는 미영의 사연에 마음이 쓰여 시간을 내주었던 춘옥이었다. 

그런데 미영이 사고를 쳤다. 외박을 한 것이다. 

친구라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미영이 말을 이었다.      


“춘옥아. 너 생물학 교수지? 근데 너, 우주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니? 저 우주 저편에 내가 또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내가 아닌 나에게 속고 살 때가 많잖아. 내 마음은 여럿이라며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것이 나라면서...내가 아닌 내가 어디에 있는 걸까? 내 속에 있을까?”     


미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들이 속삭이고 있는 거야. 저 아득히 먼 평행한 곳에 있는 또 하나의 아니, 여럿의 내가 나에게 속삭이는 거야. 나는 그들과 공존하고 있어. 꿈에서, 그리고 알 수 없는 우연 속에서...그것을 세렌디피티라고 하는 것 같아.”     


춘옥은 미영을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미영이었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미영은 춘옥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이 미영에게 큰 충격이었다는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얘가 완전히 맛이 갔구나. 얘. 정신 차려. 정신. 네가 평행이론이니 뭐니 하는 그 말도 안돼는 얘기를 믿는 거야? 얘가 왜 이러는 거야? 완전히 중증이네...너 센타에서 돌아버렸니? 뭐? 세렌디피티? 그건 그렇게 쓰는 게 아니야.”      


“근데 어떡허니? 어제 그 남자보고 그렇게 느껴 버렸으니...”     


“미친년...”     


“그 남자가 그랬어.

오페라 테너가수가 말이야. 목소리는 심장에서 나온다는 거야. 사랑이 진실에서 나오듯이. 그리고 진실은 희생에서 나온다는 거야. 그래서 해병대에 왔다는 거야. 진실한 노래를 위해...

희생과 사랑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실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면서.”     


“어머,어머 웃긴다. 너. 그 남자 사기꾼이네...그 말을 믿어? 바람둥이야..얘.”     


“새벽에 꿈을 꾸고 나서 그 남자를 만났거든....? 세렌디피티라는 노래 부르면서 말이야.

그리고 너 한테 전화한 거였어. 진해 가자고...  ”     


“........”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사직서 낸 다음 날도 그 꿈을 꾸었어. 꽃잎이 눈처럼 내리고 꽃으로 눈사람을 만들던 꿈이었어. 그때 남자를 만났어. 그 남자라고 믿어. 왜 그렇게 끌릴까?

그 남자 컬러링도 ‘세린디피티’라서? 몰라. 그래서 저질러 본 거야. 운명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있는 거잖아. 피한다고 피할 수 있을까? 저지르는 거야. 대항해 보는 거지.”     


신미영이 이런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미영이었다. 

춘옥은 아마도 중증외상환자를 간호하면서 인생의 무상과 허무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운명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우연에, 감당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한 응급 환자들을 보면서 일상에 연연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소한 것이며, 하루 아침에 숟가락 하나 제 힘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무력함을 보아오면서, 인간이라는 자존감에 회의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스스로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밤마다 자면서 꿈 하나 내 마음대로 만들어 꿀 수 있었던가? 그래 그래야 해. 운명이 있다면 운명대로, 내가 좋은 것은 좋은 대로... 

그것이 자존심일지 몰라. 운명을 당황시키는...

미영이 말했다.      


“사실은 이런 생각이 들은 지가 꽤 됐어. 그런데 점점 가까이 다가와. 

오로지 한 번 밖에 없는 인생, 오로지 한 번뿐인 기회를 오로지 하나 뿐인 나를 위해 살아야해. 욜로!(You Only Live Once!).

무책임한 인생이라고도 생각되었었어. 그러나 반대야. 차라리 자기 인생을 오롯하게 책임지겠다는 생각이잖아. 내 인생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에 맡기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저질러 버리는 거야. 까르페 디엠. (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     


춘옥은 미영의 말을 들으면서 후련함과 으스스 떨리는 위험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미영을 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데 미영아. 질문이 있어. 너는 그 남자 장석호라고 했던가? 그 남자의 진실함에 마음이 끌렸다고 했어. 진실은 희생과 사랑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너는 진실하니?

세렌디피틴지 뭔지 감정에 휩싸여서 직장도 환자도 팽개치고 너만을 위한 인생을 찾겠다는 너는 희생도 사랑도 버리고 있잖아. 그런 너를 그 남자가 사랑할까? 단 하루 밤에 빠져버린 사랑이 사랑이야? 너의 사랑은 진실한 거냐고?”      


춘옥의 말에 미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즉흥적인 것은 아니야. 희생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해 보았어.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한다는 말. 밤새 환자를 돌보며 그들의 통증을 위로하면서 내 인생을 입원실에 묻었을 때 그들은 나를 천사라 했어. 손을 잡아 주며 기도할 때, 그들은 진심으로 감사해했어. 

희생과 봉사라고들 했지...틀린 말이야.

나는 희생한 적도 봉사한 적도 없어. 나는 일을 했을 뿐이야. 열심히 했다고 희생한 걸까?

희생과 사랑을 해본 적이 없으니 팽개쳐 본 것도 없어. 솔직해지고 싶어. 

세상에 희생이란 없다고 생각해. 다 댓가가 있는 거야. 진실이야.”     


“그럼 그 남자의 희생과 사랑이란 뭐니?”     


“그 남자도 착각하고 있는 거야. 기쁨이 있어서 하는 거야. 해병대의 강심장과 군대라는 희생과 사랑을 말하지만, 진실은 성악가로서 성공의 기쁨을 위해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 뿐이야.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기쁨 속에서 말이야. 그것만은 진실이겠지.”     


미영은 희생한다고 말하며 거룩한 자들을 믿지 못한다 했다. 기쁨이 없는 희생은 고역일 뿐이라 했다. 고역은 고역일 뿐....운명이라고 했다.     


“정말 세상에 희생이란 없는 거니?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봉사하는 사람은 없는 거야?”     


“남는 것은 사랑뿐이라고 생각해. 기쁘게 희생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야. 

사랑이 없는 고역. 그것은 운명의 굴레일 뿐이야. 도리든 의무든, 어쩔 수 없잖니? 그것을 희생이라고 미화시킬 수는 없어.”     


“............”     


춘옥은 미영을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희생이나 봉사를 말하며 간호사를 지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희생과 봉사의 아름다운 직업이라고 여겨왔던 춘옥의 친구는 더 이상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너는 이제까지 고역을 담당했던 거니? 환자에게 사랑이 없었어?”     


뜨악하게 쳐다보는 춘옥을 향해 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혼동하지 마. 간호하면서 기쁨이 있었어. 자자한 평판이 기뻤고, 고액의 연봉이 기뻤고, 환자들이 고개 숙이며 감사해할 때 기쁨이 있었어. 그래서 열심히 했어. 정성껏 했어. 누구보다도 잘 했고... 아무도 날 비난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런 평판과 연봉에 나를 더 이상 파묻고 싶지 않아. 잘하는 일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거야. 평판이든 연봉이든 상관없이...내가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은 거야. 훌륭한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 중 누구랑 살고 싶겠니?”     


“찾았니?”     


“몰라 아직. 일단 떠나고 싶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어...”     


“사표는 수리됐고?”     


“오늘 중으로 수리한다고 했어. 전화를 준다고 했으니... 이제 끝, 아니 시작이야.”     


위태로운 말을 거침없이 하는 미영은 곧 멀리 떠나갈 것 같았다. 친구로서도 멀리... 춘옥은 그 심정은 이해하면서 행동하는 그녀가 미덥지가 않았다. 물가로 기어가는 아이처럼 미영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커피나 한 잔 하자.”     


춘옥의 권유에 자리를 일어서는 순간, 미영의 핸드폰 컬러링이 울렸다.      


“예. 원장님... 밖에 있는데요. 예? 왜요?”     


춘옥의 귀에도 상대편의 격앙된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새어나왔다.       


“빨리 들어오란 말이요! 30분내 들어와야 해요. 사표 수리 아직 안했으니까. 빨리!...”     


8.     


일상적이긴 했지만, 병원이 유달리 긴장하고 있었다. 원장과 각 과별로 당직 의사들이 응급실에 모여 장비와 집기들을 점검하고 있었고, 간호사들도 전원 대기하라는 지시였다. 

미영이 병원 정문을 통과할 때, 요란한 굉음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광풍같은 바람이 온 병원을 휘감아 몰아치고 있었다. 프로펠러가 두 개가 돌아가는 치누크 군용 수송 헬기였다.   


헬기에서 연신 환자들이 실려 나오고 있다. 국군 통합병원에서 치료가 어려운 위급한 환자들이 이곳에 온다. 덮어씌운 하얀 시트가 검붉은 피에 젖어 있었다. 

미영은 응급실로 달려 들어갔다. 미영의 사표 따위 아랑굿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환자들은 위중했다. 

입고 있는 잠수복처럼 생긴 검은 슈트 복을 찢어내고 응급처치로 지혈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어깨와 다리의 살점이 찢어져 덜렁거리는 상처를 위생병들이 링겔병을 들고 뛰어오며 수습하고 있었다. 그들도 온 몸이 피범벅이었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모두 네 명이었다. 야전 침대가 들려올 때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따라 붙었다. 미영이 처음 들어오는 환자에게 달라붙었다. 온 몸이 피에 젖어 있었지만 의식은 살아 있었다. 환자가 미영에게 녹슨 쇠처럼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괜찮소. 내 뒤에 있는 대원들부터 살피시오. 어서!”     


그가 대장 같았다. 

미영은 환자의 말을 무시하고 침대에 뉘이자 마자 메스로 슈트 복을 잘라냈다.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환부는 허벅지 앞에 새끼 손가락만한 구멍이 나 있고, 허벅지 뒤는 손바닥만한 구멍으로 살점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세 군데였다. 총상으로 관통한 상처였다.

상처를 살피며 몰핀 주사를 주입했을 때, 환자는 신음소리를 참다가 의식을 잃었다. 거즈와 물수건으로 딱지로 범벅이 된 상처부위와 얼굴의 피를 닦아냈다. 환자의 얼굴은 핏기하나 없이 창백했다. 


짧디 짧은 머리. 머리에 엉겨붙은 피를 닦아내며 얼굴을 보던 미영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았다. 손에 들었던 핏물 들은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지 감전된 것처럼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장석호였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장이 진두지휘를 하면서 응급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에 수용하는 등의 정신없는 처치가 벼락치듯 끝났다. 경과를 두고 봐야 할 생명이 위중한 환자가 있어 아직 안도의 숨을 내 쉴 수는 없었다.  

회진후 야간 의사와 간호사의 합동회의에서 외과 당직의사가 브리핑을 했다.     


“환자들은 해병대 IBS팀이라고 합니다. 상륙기습 훈련이라고 합니다만, 야간에 고무보트를 타고 적진에 침투하는 훈련 중이었다고 합니다. 

통상적으로 IBS훈련이 있으면 사전에 연대 상황실에서 접안하는 해안의 방어초소에 통보하여 훈련을 통제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사전에 통제가 안 된 상태에서 육군지역의 해안방어초소로 침투해 들어가 육군초소에서 적으로 오인하여 발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있을 수 없는 사고라고 합니다. 그날 기상이 이상스럽게 풍속이 강해 조류가 빨라지면서 선두에 있던 정찰조가 육군초소까지 고무보트가 흘러간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사고가 난 후 육군 측에 연락하여 겨우 사격중지를 했다고 합니다만, 군과 군끼리의 상황은 사단급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불행한 사고였고, 현재까지 3명 사망에 4명이 중상입니다만, 출혈이 많은 최해병의 경우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환자 중에 장교가 한 명 있습니다. 

이름은 장석호 소위. 허벅지에 3발의 총알을 맞았습니다. 이상입니다.”      


“그 장교가 병원에 와서 자기는 괜찮으니 대원들부터 살피라고 한 환자요?”     


“예.”     


신미영이 모기소리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장교는 장교구만... 그 환자 상태는 어떻소?”     


“배에 총을 맞은 최 해병 말고 최고 중상입니다. 발견했을 때 최해병의 복부 총상 위에 엎어져 지혈을 하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합니다.”     


합동회의 참석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는 환자들의 예후와 향후 조치에 관한 회의였다. 신 미영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감출 수 없어 자리를 일어나고 말았다.      


9.     


워낙 심각한 대형사고였다. 연일 방송 언론에서는 사건의 전말이 대서특필되었고 출입이 통제된 병원 정문 앞에는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발 디딜 틈도 없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유가족들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고 국방부 장관이 곧 사의를 표한다는 보도와 함께 사고관련 장병들에 대한 군 헌병대의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자막이 TV 전광판에 연신 흘러 나가고 있었다. 사망자는 전원 전사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했다.  

가장 심각한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부하 대원의 배위에 엎어져 지혈을 하면서 자기보다 대원들부터 살피라는 장석호 소위는 의인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육군 초소의 장병들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표창장과 함께 6개월 휴가를 보내는 특전이 시행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아이러니 했지만 군이란 그런 곳이었다. 죽고 죽이는...죽이는 자가 승자가 되는 곳이었다.

많은 별과 장교 계급장이 우수수 어깨에서 떨어졌다. 


뒤늦게 해병대 IBS팀원들이 실탄을 지급받고 있었지만, 끝까지 육군 초소에 응사하지 않은 것이 소대장 장석호의 지시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장석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장석호 소위는 다리를 절단할지도 모를 중상이라는 것이 외과팀의 은밀한 결론이었다.      


10.     


신 미영은 정신이 분열되는 것만 같았다. 

장석호. 그 남자였다. 자신이 간호책임을 맡은 환자였다. 장석호는 아직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미영의 사표수리는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환자를 두고 사표를 낼 수 있을까? 미영은 사표수리를 보류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런 훌륭한 장교의 간호를 중단하고 사표를 낼 수는 없다. 그가 퇴원할 때까지는...”     


훌륭한 명분이었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퇴원 시까지 장석호 부상을 최선을 다해 간호해 주고 싶었다. 

이 멋진 남성. 꿈에 보았던 나의 눈사람. 그때 얼굴에 그려 넣을 눈썹을 찾다가 꿈을 깨고 말았지. 바로 이 남자였을거야. 그리고 그 와의 하룻밤. 그리고 대형 사고...혹시 사고가 나 때문은 아닐까? 도대체 이 남자와 나는 뭐지? 이 운명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이야...

불구가 될지도 모르는 이 남자....정신이 아뜩했다.... 그 이후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장석호가 정신을 차리면서 가족의 면회가 허용되었다. 가장 먼저 달려온 부모, 그리고 누이 동생. 석호의 손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는 두 다리를 내려다보면서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과 오열의 눈물을 함께 쏟아내었다. 그 장면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석호 역시 눈물을 흘렸다. 미영은 눈물을 감추며 자리를 피하곤 했다.     


가족이 떠나면 미영이 석호의 병상을 찾았다. 환부의 상태를 보는 양, 그의 어깨를 안고 일어서 세우기도 하고 손을 잡아 보기도 했다.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아직 석호의 부상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치료 경과가 예상보다 좋은 것이었다. 세심한 치료와 예후관리를 하면 절단 없이 치료를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영은 정성스레 석호의 상처와 상태를 관찰하였다. 의사는 상처를 치료하고 간호사는 환자를 치료한다. 

그를 다시 보았다. 짙은 눈썹, 뚜렷한 이목구비. 영화배우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얼굴. 그리고 그 목소리... 

신미영은 석호의 병상을 떠나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는 수간호사의 모습에 병원에서는 희생과 봉사의 화신 나이팅게일의 화신을 본다며 상찬해 마지않았다. 

비밀스런 혼자만의 데이트였다. 야근할 때면 자고 있는 석호의 얼굴을 한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석호의 손과 몸을 마음껏 만져볼 수 있었다. 

이 은밀한 기쁨이란...그 기쁨이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이 남자가 언제 나를 알아볼까? 

언젠가는 말을 하긴 해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밤 BOQ에서의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져 차마 먼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그가 나를 알아보겠지...

생뚱맞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를 알아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수줍게? 새침떼게? 아니면 놀란 척?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가 퇴원해도 병원을 그만 두는 것이 옳을까? 만일 이 남자가 장애인이라도 된다면?

미영은 별 해괴한 생각을 다하고 있다면서 스스로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지만, 마음은 낮이나 밤이나 온통 장석호 생각뿐이었다. 석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성임을 확인할 때 기쁨과 희망이 생기곤 했다. 

이 끌림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춘옥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기쁘게 희생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야.”     


떠나고자 했던 병원을 못 떠나고 미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욜로! (하나뿐인 인생. 저지르고 보는 거야...!)”     


5월이 되면서 날씨가 화창하여 석호는 병실 밖을 보고 싶어 했다. 미영은 휠체어를 준비했다. 찬스라고 생각했다. 벚꽃도 살구꽃도 목련꽃도 지고 라일락이 꽃봉오리를 맺고 있는 정원을 걸으면서 그 날을 기억시켜 보고자 했다.

석호는 처음으로 산책을 한다는 들뜸에 젖어서인지 아침부터 기분이 밝았다. 병상에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미성의 중저음이었다. 그리고 미영을 쳐다보았다. 미영과 눈이 마주쳤다. 

미영은 가슴이 한 근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저 눈빛...이제껏 보던 환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석호는 유심히 미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나를 알아보고 있다.... 미영은 짐짓 석호의 눈빛을 피했다. 

이때 병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동생이었다.           


“아. 어서 들어 와...오늘 휠체어를 밀어줄 동생이에요. 어제 연락했지요.”     


누이동생은 미영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녀는 석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오빠. 오늘 햇빛이 너무 좋지? 내가 휠체어 밀어줄게. 나하고 산책하자... 노래 한 번 불러 봐.”     


그러면서 미영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는 눈짓을 하고는 선심을 베푸는 양 휠체어를 밀고 병실을 나갔다. 미영은 휠체어를 밀고 나가는 누이동생의 뒷모습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스스로 허망함을 참으며 어이없게도 질투심이 사정없이 느껴지는 자신에 굴복해야 했다.       


 ‘어린아이가 잠을 못 이루는 이유가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아침이 되면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일이 있어서...

또 하나는 아침이 되면 기다리는 행복에 가슴이 설레서...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말이야...‘     


어젯밤 잠을 못 이루었다. 다음날 석호와 단 둘이 나가는 소풍이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노래를 신청해야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다른 꽃이 없는 곳이지요. 안 그래요? 

혹시...‘꽃밭에서’ 노래 아세요?”     


BOQ에서 불러주었던 그 노래.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날에 이렇게 좋은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석호도 이 노래라면 미영을 확실히 기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었다.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무서웠다. 

내가 미쳤나? 눈이 멀었나? 그 남자와 분위기에 취해, 술에 취해, 꽃에 취해 보낸 하룻밤.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와 같은 마음일까? 아니면? 무서움이 엄습했다. 

아침에 올 무서움과 행복함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떻든 어쩔 수 없었다. 대책도 없이 쏠려지는 이 마음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런데... 

동생이 그 아침을 미영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허무함이 가슴 속 동굴에서 헛바람이 되어 세차게 불어 나왔다.  

산책이 끝나고 간호사 실에 있는 미영을 누이동생이 찾아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빠에게 말씀 들었어요. 정성을 다해서 간호해주시고 있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미영은 얇은 미소를 지은 채 듣고만 있었다. 동생은 몇 가지 물어 볼 말이 있다고 했다. 환자의 보호자로서 궁금한 것은 늘 가득한 법이다.     


“장석호씨의 상태가 어떤지요. 다리가 정상으로... 치료될 수 있는 거죠?”     


장석호씨...?

여성의 직감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미영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할 것인가? 머뭇거리고 있는 미영에게 누이동생이 말했다.      


“저에게는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저는 석호씨와 미래를 약속한 사이거든요.”     


“...........”     


“양규선이라 합니다. 석호씨와는 대학 후배예요. 성악을 했죠. 제대하면 함께 이태리로 유학가기로 했거든요.”     

신미영.

간호학을 공부할 때 배웠다. 사람이 고층 건물에서 떨어질 때, 전 인생이 필름처럼 뇌리속에  상영된다고...순간의 찰나에 불과하지만, 몇 시간 분량의 필름이 스쳐간다고... 가족도 친구도  온갖 친지들과의 즐거움도, 아쉬움도, 후회도 그리고 그들 모든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도 모두 다 지나간다고...

그런 필름이 상영되고 있었다. 미영은 천 길 벼랑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석호에게 약혼녀가 있었구나...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구나...

진해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실 때 울렸던 그 세렌디피티 컬러링. 그것을 마치 나의 운명처럼 생각했었지... 

그런데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면서 나를 침대에? 

그의 맑고 울리는 목소리. 희생과 사랑이 있을 때 진실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던 그... 

미영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미영은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고 있는 가눌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장석호. 

총을 맞고도 나보다도 내 대원을 먼저 치료하라는 목쉰 목소리...

미영은 쉰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경과는 지켜보아야 하지만, 잘 살펴주면 절단없이 치유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인사말을 들으며 미영은 병원을 나왔다. 

숨어서 울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아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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