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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노스 최민호 May 17. 2019

세렌디피티(Serendipity)

[제3편]


12.


춘옥의 눈앞이 안개처럼 흐렸다. 춘옥은 카페에서 일어나 병원 현관을 향해 걸어 나갔다.  

미영을 생각하니 걸음이 스폰지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춘옥이 현관문을 향할 때 급한 발걸음으로 막 현관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현관을 나가는 춘옥을 보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뚫어지게 춘옥을 바라보았다. 

춘옥도 의아한 마음에 마주 보았다.  

풀을 먹여 빳빳한 얼룩무늬에 반짝이는 계급장이 달린 반듯한 팔각모.

춘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장석호 소위와 포장마차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셨던 장교였다. 

그가 말을 건네 왔다.        


“혹시..그때 같이 오셨던 분 아니시던가요? 장석호 소위라고...

신미영씨 친구 분 되시지 않나요? 저 박기춘 소위입니다.”     


춘옥의 명치끝 가슴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박소위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춘옥은 감정을 억누르며 박소위를 무시하고 옆을 지나쳐 현관을 나가려 했다.


 “잠깐만...신미영씨에게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혹시 어디 계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장석호 말입니다....장석호가 전할 말이 있답니다. 자기는 말을 못하겠다며...”     


춘옥은 박소위를 노려보았다. 눈에 단검을 꽂듯 말했다.      


“신미영이 여기 없습니다.”     


“압니다. 알고 왔습니다. 석호가 그러더군요. 떠날 거라고. 그래서 부랴부랴 왔습니다. 대신이라도 전해주십시오. 친구 아니십니까?”     


춘옥은 하는 수 없이 박기춘과 다시 카페에 들어왔다. 카페에 마주 앉았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기춘이 꺼내놓은 명함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박기춘이 말을 꺼냈다.       


“남자를 아십니까? 아마 모르시겠지요. 남자는 여자들이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일겁니다. 남자끼리도 그렇습니다. 남자들이 만나면 세상에 못하는 말이 없고 비밀이 없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아닙니다. 아무리 어릴 때 친구라도, 전우라도 평생을 말하지 않고 지키는 비밀이 있게 마련입니다.”     


“..............”     


“그게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자존심입니다.

남자는 동물이예요. 자기의 약한 면을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약점을 건드리면 적개심이 들지요. 여자는 반대라고 하더군요. 자기의 약한 면을 털어놓고 위로해주는 친구를 진정한 친구라고 한다면서요. 우리는 강점을 칭찬해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     


“그런데 약점을 고백할 때가 있어요. 그때는...항복할 때입니다. 

항복이란, 약점을 인정하는 남자의 태도입니다.”      


“...............”     


“석호가 항복해 왔습니다. 전화로 부탁하더군요. 저도 항복합니다. 친구 분 성함은 모르지만 항복하겠습니다. 항복합니다.”     


춘옥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무엇을 항복한다는 말인가요?”     


“석호에게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비밀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석호가 저에게 그 말을 하면서 신미영씨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 날 여러 가지로 실례한 점 사과드립니다. 바래다 드리지도 못했고요.”     


“약혼녀가 있다는 것이 왜 비밀이지요?”     


“그것을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 비밀로 했는지...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 했습니다. 자기 입으로는 죽어도 못하겠더라고 하면서요...”     


“비겁하군요. 직접 사과해야지...친구를 시켜서 하다니요.”     


춘옥은 입을 비쭉이며 말했다. 고작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항복이란 말인가? 격한 감정이 다시 일어났다.      


“비밀을 말했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저에게도 비밀이었던 걸 신미영씨에게 할 때는 그만한 아픔이 있을 겁니다. 이유는 묻지 않았습니다. 친구로서 그 아픔을 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전해주십시오.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것입니다.”     


그 말을 할 때 박기춘의 모습은 자못 당당하고 남자다워 보였다. 

그렇지만 이미 미영도 아는 사실 아닌가? 새삼스럽게 전하고 자시고 할 말인가 싶었다.

비밀이지만 약혼녀가 있었는데, 미안하다... 결국 신미영에게 사과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떠나달라는 말 아니겠는가. 다시 울화가 치밀었지만, 춘옥은 박기춘의 순진하고 진정어린 모습에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알겠어요. 그런데 미영에게 그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해서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고요. 박소위님이 직접하고 가시지 그래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아까부터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다행히 친구 분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꼭 전해주십시오. 저도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 새벽 훈련 출동합니다. IBS훈련입니다. ”     


TV에서 보았던 그 악명 높은 IBS훈련.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으면서...     


“또 IBS 훈련이예요?”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박소위는      


“전사자는 전사자고 해병대는 해병대입니다. 금번에는 제가 경계정찰조 장석호 소위의 임무입니다. 해병대는 해병을 위해 있는 군대가 아닙니다.”     


“그러면요?”     


“당신들을 위해 있습니다. 가야합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계를 보더니, 박기춘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춘옥에게 차렷하더니 장군에게라도 하는 양 최고의 예를 갖추어 반듯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춘옥은 엉거주춤 박소위의 경례를 받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밀고 나가는 박소위를 보았다. 묘한 여운이 남았다.      


“IBS 훈련.. 그 위험한 훈련에...장석호의 임무를.”     


춘옥은 박기춘의 명함을 핸드백에 넣었다. 병원을 나왔다. 

기분이 매우 안 좋은 날이었다. 현관문을 나서고 보니 날은 흐리고 비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순간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비가 쏟아져도 IBS훈련을 할까?’           


13.      


또 다시 수류탄이 작렬하며 파편이 공중에서 사방으로 날았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최해병의 몸이 용수철에 튕기듯 하늘로 솟아 올랐다. 그리고 떨어질 때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장석호는 총에 맞아 피가 흐르는 오른발을 끌면서 두 팔로 기어서 최해병에게 다가갔다. 최해병은 신음소리를 뱉을 때마다 입에서 피가 솟아 나왔다. 팔이 떨어져 나간 팔뚝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고 있었다. 장석호는 두 팔로 K1 자동소총을 움켜쥐고 떨어져 나간 최해병의 팔을 입에 물었다. 이걸 잃어버려서는 최해병은 불구가 된다. 놓치지 않도록 이빨에 힘을 주어 물었다. 

비릿한 피가 입안에 고이기 시작했다.  

총을 허공에 대고 마구 휘저었다. 앰뷸런스가 어디선가 달려왔다. 위생병이 들것을 들고 달려오자 장석호는 입에 물었던 최해병의 팔을 뱉어냈다.  

위생병이 장석호가 뱉어낸 핏덩이를 주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최해병의 머리통이었다.  장석호는 놀라 비명을 마구 질러댔다.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식은 땀으로 환자복이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악몽이었다. 

간호사들은 장석호의 이마와 몸의 땀을 닦아주며 안정제 수액을 링겔 병에 꽂고 있었다. 

장석호는 두리번거리며 간호사들을 둘러보았다. 

신미영은 없었다. 

다리가 욱신거린다. 트라우마...외상후 장애 스트레스는 양상이 다양했다. 

간호사들이 석호를 달래며 혈압과 호흡상태가 괜찮은지 푸른 파장의 곡선이 끊임없이 점멸하는 모니터를 보며 확인했다.  장석호는 깊은 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안정시켰다. 

신미영과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하던 날, 장석호는 신미영에게 조용히 물었었다.     


“어떻습니까? 제 다리는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어요. 트라우마입니까? 불타는 전투복 속에서 울부짖는 부하들이 보입니다. 어느 날은 총알이 제 목을 뚫고 지나가는 때도 있고요. 목을 움켜쥐고 안 나오는 소리를 지르다 깨지요. 저 괜찮을까요?”     


신미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그런 불 속의 지옥에서 살아나신 것만도 기적이지요. 무엇보다 안정이 중요해요. 자꾸 지나간 일을 되새기지 말고 밝은 날을 꿈꾸세요. 밝고 행복한 생각을 하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해요. 지나 간 것은 지난간대로, 아무런 후회도 하지 말고요.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마음 편히 잡수세요.”     


“지나 간 것은 지난간대로... 후회없이 살았노라고 ”     


노래가사를 생각하며 석호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신미영...

벚꽃 핀 하룻밤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병실에 들어와 주사를 놓을 때나 혈압을 잴 때나 그녀가 어루만져줄 때는 몸이 솜사탕처럼 녹는 것 같았다. 한번 잰 혈압을 이상하다고 두 번 세 번 재달라고 보챘다. 그럴 때마다 신미영은 살짝 웃으며 다시 재 주곤 했었다. 

작은 행복이었다.

이상스러운 것이었다. 쓰레기 통속에서 그런 장미가 피어나다니...누더기가 되어버린 몸과 갈갈이 찢긴 마음 속에서 그런 행복감이 피어나다니...

신미영이 돌봐주고 간 밤에는 흐르는 핏방울이 꽃으로 피어나는 꿈을 꾸었다.

악몽도 길몽도 꿈은 내면이 연출하는 내 마음의 영화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주인공이면서 내가 관객인 영화. 나 혼자 주연이었던 그 영화 속에 어느 날 여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가 화면을 점점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양규선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하루는 밝은 얼굴로 양규선이 석호의 병상 끝자락에 비집고 앉았다.      


“오빠. 많이 아프지... 괜찮을거래. 다행이 총알이 다리를 관통했는데 패혈증 같은 증세가 없대.. 뼈가 부서졌지만, 봉합하면 완쾌될 수 있대. 정말 운이 좋았다는 거야. 죽거나 불구가 될 수도 있다는 거야. 오빠의 맑은 목소리를 하느님이 보호해 주신거래. 하느님이 주신 목소리니아무도 못 빼앗아 간데...”     


“누가 그래?”     


“간호사가. 신미영이라고 담당 간호사가 그랬어. 장석호씨의 목소리는 하늘이 주신 거라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신의 축복이라고. 그러니 괜찮을 거라고. 정상적으로 회복될꺼라고...내가 오빠 약혼녀라고 하니까 진지하게 말해주더라고...”     


석호는 가슴에 1톤 철근이 내려앉은 듯 철렁했다. 약혼녀....

그 뒤부터 신미영이 달라졌다. 

휠체어 산책을 하던 날, 석호는 신미영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또렷이 알고 있다. 또 그 날의 그 밤도. 내가 기억하듯이...’


미영이 노래를 해보라고 했을 때 석호는 ‘꽃밭에서’...그 노래를 하고 싶었다. 그녀들과 함께 부르며 벚꽃 속을 거닐던 그 설레임. 그 느낌으로 그녀를 다시 대하고도 싶었다. 

그렇지만, 그 노래는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였다.      

‘그 노래는 죄인의 자백이 된다. 죄악의 서곡이 된다. 그녀도, 나도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불온한 금지곡이다.’      

그리고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 나비부인이었다. 

사랑했지만,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순간, 다른 어떤 사람은 사랑의 치명상을 입고 만다.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기쁘고도 슬프고도 아픈 노래. ‘어느 개인 날’이었다. 

십자가를 진 순교자의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나의 마음을 아시겠냐고...

그러나 신미영은 오페라를 모르는 여자였다. 알았다면 다 알아 들었을 이 노래를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좋았다. 언제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함께, 곁에 있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규선이 말해버렸다. 약혼녀...      


‘신미영씨.’     


휠체어에서 떠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가 돌아보면서 바라보던 그 눈빛. 석호도 미영도 알아 버렸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척 알고 있는 모르는 사이’라고.

그리고 다음 날 밤.   

잠이 들지 못해 눈을 감고 있는 장석호의 병실에 신미영이 들어왔다. 링겔 수액을 확인하고 모니터를 보면서 혈압을 재고 석호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워넣고 석호의 팔소매를 걷기 위해 신미영이 장석호의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짐짓 잠든 척 이리저리 미영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던 석호의 얼굴에 한줄기 바람이 느껴졌다. 뜨거운 바람이었다. 미영의 숨결이었다. 그리고 이내 입술에 와 닿는 촉촉한 접촉. 

링겔 병의 스텐드가 흔들렸다. 그리고 얼굴에 떨어지는 링겔 수액 한 방울. 두 방울.

석호는 그것이 미영의 눈물인 줄 체온으로 알았다.  

석호가 눈을 뜨는 순간, 미영은 석호의 두 눈을 감기고 석호의 몸에 와락 엎어졌다.  

깁스와 주사 줄에 묶여 팔도 다리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마저 감기운 채 석호는 미영을 받아들였다. 깊고도 뜨거운 키스였다. 뜨거운 입맞춤 속에서 적셔지는 뜨거운 눈물. 

순간처럼 짧았지만, 영겁처럼 긴 키스를 하고나서 미영은 몸을 일으켜 병실을 나갔다.  

그렇게 병실을 떠난 그 밤 이후, 아침에도 점심에도 신미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간호사의 말은 간단했다.      


“사직했습니다. 벌써부터 하려고 하다가 환자분 때문에 미룬 것이었어요. 워낙 중상이다 보니...”     


신미영은 그렇게 떠났다. 석호가 못내 해야 할 말을 하지도 못했는데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날. 세렌디피티의 컬러링이 울리고 벚꽃이 술잔위에 흩날리던 그날 밤.

행복했노라고, 진실했노라고...

나의 운명이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는 예감에 IBS의 노를 저으면서도 바닷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노라고....

꿈 속인 듯 생각나는 미영씨 생각에 그믐밤의 차가운 새벽 바다공기도 뜨겁게만 느꼈졌었노라고... 

고백할 것이 있노라고... 내 마음 나도 알 수 없는 이 심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노라고...나를 구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뒤로 하고 미영은 떠나고 말았다.  

천진스런 동생 규선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으랴. 

나의 스승 양용식 작곡가. 그 분의 딸. 양규선. 나의 약혼녀...     


미영이 떠나고 밤의 악몽이 다시 시작되었다. 꿈에서 깨어나서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부여안았다. 눈물이 흘러 나왔다. 처음으로 후회라는 파도가 밀려왔다.       


‘왜 굳이 그렇게 말리던 해병대를...’     


음대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를 지원한다 했을 때 양교수와 규선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결사코 반대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복무기간이 길고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위험한 것은 그렇다 치고 왜 3년간을 군에서 썩느냐는 것이었다. 상종가를 칠 나이인데... 

석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후회가 된다. 막심하게 후회가 된다. 

평범하게 콩쿠르에서 입상해서 면제를 받아내던가, 아니면 짧은 기간에 경력이 단절되지 않을 어디 군악대로 가든가...

그 정도의 조치는 양교수의 힘으로 못할 바도 없었다. 그토록 권유했건만 뿌리치고 지원한 해병대 장교...

초래된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불행했다. 

장석호는 신미영이 떠난 병상에서 아픈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한없이 울었다.        


14.     


장석호가 양용식 교수와 만난 것은 이태리 식당에서였다. 

레스토랑 “카르페(CARPE)”.

우연히 눈에 띠어 들른 이태리 식당에서, 주문을 받으러 가죽 표지 메뉴판을 가져 온 청년이 장석호였다.      


“아니, 자네가 여기 왠 일인가?”     


장석호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당황한 것은 양교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장석호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했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이태리에 유학 온 것입니다.”     


“군에 입대한 것이 아니고?”     


어안이 벙벙한 양교수에게 석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군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때문에요.”     


“.............”     


장석호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양교수는 처음으로 이 부잣집 아들처럼 생긴 녀석이 지독하게 가난한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외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이야기를 들은 양교수는 의외의 마음이 들었다.      


음대는 가난한 학생이 오는 곳이 아니다. 올 수가 없는 곳이다...

음대는 재능도 중요하지만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재능의 차이란 어느 수준을 넘으면 실 날보다도 가는 것이었다. 질투의 신은 결코 천재를 홀로 보내지 않는다. 한 몸에서 서로 싸우는 머리 둘 달린 뱀처럼 꼭 경쟁자를 보낸다. 

예술의 엣지(edge)에서 대가는 재능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재주를 넘어선 능력이 필요하다. 

멘토와 메니저.

노래를 얼마나 잘하느냐보다 누구의 마음에 들었느냐에 노래와 가수의 미래가 결정되곤 한다. 그것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 운명을 ‘기회’라고 쓰고 읽는다. 

그 기회의 손을 잡고 다니는 아름다운 여신이 있다. 영악한 사람들은 그 여신을 ‘돈’이라고 쓰고 읽는다. 음악의 신은 기회의 여신과 동침하고 있었다.      


멘토와 메니저와 머니.

이 3개의 M이 뮤직이라는 M을 지배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양 교수는 장석호를 유심히 보아 왔었다. 저 인물에, 저 음색 그리고 저 분위기. 부유한 환경이 아니면 저절로 나올 수 없는 아우라였다. 오페라든 뮤직컬이든 딱 주인공의 틀이었다. 작곡을 하며 케스팅을 하는 양교수의 시야에 장석호는 늘 가시거리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런 장석호가 2학년을 마치자 입대를 하겠다며 찾아왔던 것이다.  

어차피 가야할 군대. 빨리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직 조금 이른 것 같다는, 조금 아깝다는, 조금 숙성시킨 다음 선택해도 좋을 길을 서두른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국방의 의무는 지엄한 것이었다.     


“빨리 가야 빨리 나오지 않겠습니까?”


선포하듯 말을 하고서는 쿨하게 웃고 돌아선 장석호. 그리고 한동안 사라졌었다.

그랬던 그가 가 있어야 할 곳에, 들고 있어야 할 것을 들지 않고, 레스토랑의 테이블 옆에서  메뉴판을 들고 서 있는 것이었다.  

외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지 않고 일을 하던 어머니가 병으로 누운 지가 6개월. 학업을 떠나 생계를 보살펴야 할 석호가 선택해야 할 길은 군 입대도 사치스런 것이었다. 석호가 대학을 포기하고자 할 때 어머니는 말했다고 한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야. 하늘의 자식이야. 그렇지 않고 그런 목소리를 가질 수는 없어. 나에게 신이 너를 맡긴 거야. 신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다. 노래를 하거라. 어떻게든...”     


석호의 이야기는 음식이 나올 때마다 끊겼지만, 파스타의 면처럼 길고 연했다. 장석호가 교수에게 말했다.      


“그래서 1년간 이태리 유학을 온 것입니다. 이 식당 셰프가 이태리 사람이라는 것은 아시죠? 이태리 말을 배우는데 얼마나 좋은 기회겠어요. 성악을 전공한다니까 세프도 좋아하더군요. 이태리 노래 몇 곡 부르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셰프가 가르쳐주더군요. 이 집 상호라면서...”     


“카르페 포테스타템!(Carpe potestatem)”     


석호가 이태리말로 유쾌하게 외쳤다.        


“기회를 잡아라!”     


멋진 녀석이었다. 기껏해야 알바를 하는 처지이면서 저렇게 멋있게 말한다. 

그날 양 교수는 파스타의 맛도 몰랐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교수는 석호에게 명령했다.      


“당장 그만 두어라. 당장. 그리고 내 사무실에서 일해라.”     


그렇게 장석호는 양용식 교수를 만났다. 이름만으로도 극장이 문을 열어준다는 뮤지컬의 대부, 그가 작곡을 하고 연출을 하면 호박도 대박이 된다는 살아있는 전설...

양용식 교수의 애제자가 된 것이었다.  

기회의 여신은 장석호에게 한꺼번에 3개의 M을 선사한 것이다. 3개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행운의 열쇠까지 선사했다. 확실하게 영광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딸 규선이었다.      


15.      


“오빠. 오빠. 좋은 소식 있어...”     


규선은 병실에 찾아 와서는 밝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석호가 입은 불행의 그림자를 웃음으로 지우려는 표정을 보이는 것이었다. 석호 또한 그녀를 보면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그녀의 여리고 예민한 마음을 달래 줄 수 없는 안타까움이 만들어 내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규선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빠. 오빠...아빠가 그러시는데 오히려 잘됐대.. 왜냐하면 다리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뭐라고...의병제대?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동시에 제대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면 얼마나 좋아? 1년 만에 군을 마치는 거잖아. 그것도 장교로 명예롭고 영웅스럽게...

오빠. 그러면 우리 이태리로 유학 떠나자. 같이...”     


규선은 석호의 사고를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밝아져 있었다. 

이태리. 생각만 해도 규선은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석호 오빠와 함께 곤돌라와 마차를 타고 베니스, 밀라노, 피렌체를 여행하며, 라 스칼라 좌에서 감상할 오페라의 명작들...그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불멸의 작곡가 롯시니, 베르디 푸치니...

생각만 해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말했었다.     


“오페라를 작곡하며 이태리를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세상의 어떤 언어보다 음악적인 언어. 

독일어나 영어에서 도저히 나오지 않는 훨씬 밝고 힘 있는 모음들. 이태리어의 리듬감은 말 조차가 음악으로 들린다. 한국어로 아무리 잘 불러도 이태리어가 아니면 그 느낌은 살아나지 않아. 이태리를 가지 않고 오페라를 부를 수는 없다.”     


어릴 적부터 성악은 이태리라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이태리 찬사였다. 

이태리에서 공부한 아버지는 이탈리아어에 능통했다. 규선은 스스로의 인생 프로그램에 이태리에 가는 것은 예정된 조화로 믿어 의심해 본적이 없었다. 다만, 누구와 함께?

동반자마저 아버지는 예비해 주셨다. 석호 오빠...

그 석호 오빠와 이태리 가는 것이 사고를 당해 오히려 당겨졌다는 사실에 눈을 뜬 순간, 세상은 감사와 축복으로 다시 빛나 보였다.  

꿈이 이렇게도 이루어지는 것인가...     

규선의 말을 듣고 장석호는 박기춘 소위에게 전화를 했다.      


“박 소위. 부대 별 일 없나? 면회 좀 와. 물어 볼 것이 있네.”     


주말에 박기춘이 병실에 면회를 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씩 웃었다.      


“자식. 기합 다 빠져 가지고...입에서 커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만.”     


빳빳한 팔각모를 벗고 짧게 깍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길 때, 박소위 겨드랑이에서 훈련에 절은 땀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장석호 소위에게는 새삼 오랜간만의 냄새였다.      


“소식 들었나? 장소위. 다행이더구만.”     


“뭐가.”     


“자네 말이야. 징계에서 감면됐었다는 것 말이야. 그 이야기 아니야?”     


“무슨 말이야....”     


“허. 몰랐나? 자네 징계 위원회 회부됐었잖아.”     


“내가?”     


“몰랐었나보군. 자네 징계위원회에 회부됐었어. 직무 태만으로. 부하 대원들을 3명이나 사망한 소대장으로서 문책사항이 없는지 말이야?”     


“문책? 내가? 사고였지 않나? 무슨 책임?”     


“이 친구. 정신 없네. 자네 임무가 경계정찰조장 아니냔 말이야. 경계정찰조가 왜 있나? 바로 그런 사고를 방지하라고 선두에 서는 것이잖아? 근데 뭐했어? 멍청하게 있다가 당했잖아. 중대 본대가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야... 이 사람아...훈련하는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가지고. 그러니까 기합이 빠진거야.”     


장석호는 멍하게 박소위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밉상스런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표정을 본 박소위는,     


“징계위원회에 훈련 전날 자네의 행적을 소상히 조사해서 보고 됐었어.”     


“...........”     


신미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BOQ 침대에 여자를 끌여들였다는 것. 징계감이었다. 

새벽의 IBS가 떠 올려졌다. 훈련하면서도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직 신미영 얼굴만 떠올렸었다. 그것이 부하들을 죽게 했단 말인가?

장소위가 엄숙히 말했다.      


“그래서....”     


박소위는 한참 뜸을 들였다.      


“거짓말 할 수는 없었네. 사관학교에서 배운 정직. 우리의 생명 아닌가. 전날 밤 우리가 보냈던 시간....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어. 아무 말 하지 않았네...비밀을 지켰네. 우리는 해병대 아닌가. 해병대 의리가 그건 아니잖아... 

다행이야. 자네가 징계에서 제외됐다는 게.”      


장석호는 간담이 서늘했다. 해병대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줄 알았더니. 징계회부?     


“연대장이 모든 책임지고 중징계를 받아들였네. 부하들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 사단 연락장교는 구속됐네. 육군과 해병대의 상황관리는 국방부야...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사단장 모두 사임했네. 뉴스에서 들어 알고 있겠지...

육군은 전원 표창에 포상휴가 갔고...”     


장석호는 박 소위의 말을 듣자 정작 묻고자 한 의병제대 얘기는 꺼내기도 힘들었다. 

박기춘이 병상에 오더니 장소위의 다리 깁스를 들춰 보았다.      


“상처는 어떤가? 좋아지고 있지? 별일 없겠지?”     


“응. 좋다고 하는구만. 최근에 다리가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장소위. 참모회의에서 자네 이야기가 나왔네. 군 생활에 지장이 없다면 당연히 원대 복귀지만, 워낙 중상이라 자네가 원한다면 의병제대도 적극적으로 고려해보겠다는 인사참모 보고였어.”     


“..........”     


“자네는 우리와는 다르잖아. 우리는 군인으로 죽을 몸이야. 자네는 노래로 죽을 사람 아닌가? 잘 생각해 봐. 의병제대는 불명예가 아닐세. 명예로운 전역이야. 자네에게는...”     


박소위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나에게 면회 오라고 한 용건은 무언가?”     


“아니야. 없네...자네 얼굴이 보고 싶었어. 골수 해병대 얼굴..”     


박소위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더니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지난 번 손춘옥을 만났네. 신미영이 떠났다고 하던데....지금 없나?”     


“내가 전하라는 말은 전했나?”     


“약혼했다는 말? 맞아 죽을뻔 했다. 이 기합빠진 장교야. 신미영이 없다고 하면서 전할지 어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더군.”     


장석호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이 친구에게도 더 이상 말하기는 싫었다. 

약혼했다는 사과가 어떤 의미로 신미영에게 받아들여질지....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자신이 약혼했다는 것을 자백함으로써 미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을 미영은 알아채주지 않을까? 

그런 미묘한 심리를 해군사관학교에서 배울 리는 없다. 일직선의 정사각형 박기춘 소위가 그것을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지만, 전하지도 못했다니...

다시 가슴이 무거웠다. 

장석호가 박소위 귀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귓속에 대고 차분히 또렷하게 말했다.      


“가서, 전하라. 박소위. 해병소위 장석호는 부상당했다는 이유로 의병제대 신청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박소위는 장석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어서더니 장석호에게 경례를 천천히 갖다 부쳤다.      


“필승. 꾀꼬리.”     


성악을 했으면 군에서는 꾀꼬리다. 

장석호는 자유로운 왼손을 이마에 갖다 대며 정중하게 경례를 받았다.     


“필승. 비밀이다. 알겠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박소위는 떠났다.

박소위가 떠난 뒤 장석호는 병실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내 운명은 꼬이기만 할까? 아니 나는 왜 파멸의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멍청한 짓만 골라 할까?

의병제대를 하는 절차를 물으려 박소위를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속이 뒤집어지는 말만 하고 갔다. 

직무 태만? 부하들을 죽인 지휘책임? 문란한 사생활?

사실, BOQ에서 훈련 전날 있었던 일이 알려지면 여론은 어떻게 돌변했을까?

모든 책임을 장소위가 져야 할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비난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신미영에게 사과를 하라는 메시지는 전해지지도 않았고...

그리고 의병제대를 하고 양규선과 이태리로 유학을 떠난다...?

석호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주마등 같이 곽한식이 생각났다.     

졸업 연주를 앞두고 곡 연습을 하고 있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호흡이 맞지 않았다. 피아노 반주와 합이 되지 않아 반주를 맡고 있던 곽한식에게 언성을 높혀 화를 낼 때 갑자기 곽한식이 피아노 뚜껑을 꽝 덮으면서 장석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맞았어. 내가 틀렸지. 장석호가 틀릴 수는 없으니까. 다 내가 틀렸다.”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장석호가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에


“너는 그런 사람이잖아. 금테 두르고 세상사는 사람. 잘 생기고 성량 좋고, 거기에 양교수의 총애를 받고...따님까지 꼬셔났으니 장태자가 된 것이잖아. 네가 어떻게 틀려. 다 너에게 맞추어줘야지. 이제 네 인생은 뻔하잖아. 

콩쿠르 입상에 군대 면제, 졸업하자마자 공주와 약혼, 그리고 이태리 유학. 그리고 곧 결혼식 초대장이 날라 오겠지. 르네상스 호텔 크리스탈 볼륨에서..

아마도 오페라를 하고 성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모일거야. 양 교수님 딸의 혼사니까. 사위 이름이야 잘 모르겠지만 곧 알게 되겠지.  

차세대의 떠오르는 히어로 테너 장석호. 그게 너의 첫 데뷔 무대 타이틀 아니겠어.

10년이 지나면 또 무슨 축복이 이어질까?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장석호? 

비극이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비극의 주인공 역을 잘도 해내겠지. 끝나면 박장대소를 하겠지. 미안해. 나 같은 놈이 자꾸 틀려서...다신 나를 보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이랑 잘 해 봐. 다음 달 나는 군대에 끌려가니까. 부디 성공하게. 금수저 장석호. 굿바이!”     


하면서 일어나 가버리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금수저?

그러나 그것은 곽한식의 생각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규선과 사귀면서부터 장석호에게 친구들이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았다. 유난히 더 친하게 접근하는 친구와 은근히 석호 주위를 배돌면서 따돌리는 친구. 

곽한식은 두 번째였다.

질투때문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질투를 넘어 그들의 눈빛에는 저주가 배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곽한식은 산 속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살이었다. 

충격이 엄습해 왔다.     


장석호는 규선과의 약혼은 그저 순리에 따른 것이라 생각했었다. 딱히 흠이 없는 규선이 자신을 오빠 오빠하며 따르며 약혼하자 할 때 거절할 명분도 실익도 없었다. 양교수와의 의리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렇게 약혼은 손쉽게 이루어졌었다. 

그때부터 석호를 보는 친구들의 눈은 달라졌다. 선망하며 증오하는 그들의 눈빛이 따가웠다. . 

나의 절망은 참을 수 있어도 남의 희망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질투였다. 

곽한식의 마지막 남긴 말이 장석호를 괴롭혔다. 곽한식의 죽음이 마치 자신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곽한식도 미웠지만 자신도 싫어졌다. 

곽한식의 장례식장에서 장석호는 영정에 있는 곽한식을 노려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못난 자식. 나쁜 자식. 너는 네가 얼마나 못난 놈인 줄 몰랐을 거다. 네 생각이 얼마나 틀린 건지 죽으면서도 몰랐지. 바보같은 녀석. 너는 지옥에 가서야 깨달을 거야. 네가 얼마나 못나고 잘못된 놈이었는지. 내가 증명해 주마. 알았어? 너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마라. 나를 보란 말이다.”     


남들은 그의 애석한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했지만 장석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그리고 해병대 장교 지원서를 냈다. 펄펄 뛰는 양규선과 양용식 교수에게 석호는 담담히 말했다.      


“성악은 평생에 걸쳐 쌓아야 할 탑 아니겠습니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연예인이 아닙니다. 3년이 성악가의 긴 인생을 좌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병대 장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일 것입니다.”      


장석호는 곽한식에게, 아니 세상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입증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금수저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 나는 흙수저로 금을 팠단 말이다. 곽한식. 보란 말이다. 이 못난 놈아.”     


해병대 지원은 장석호의 자존심이라기보다 세상을 향한 반항이었고, 금수저들을 향한 항거였고, 비굴하게 세상에 아첨하는 늙어빠진 어린놈들에게 인생을 걸고 내민 결투신청서였다.     


‘누구나 해병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해병대 훈련은 모질었다. 두려움이 스며드는 훈련장의 구호를 보면서 장석호는 이를 악물었다. 장석호에게 해병대는 국가를 위한 헌신도 희생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을 지키기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더러운 두뇌의 인간들을 근육의 인간으로서 서슴없이 경멸하기 위해 두 다리로 찾아온 곳이었다.      


의병제대...

명분도 근거도 분명했다. 그러나 신미영과 곽한식을 생각하자 마음이 더럽게 찜찜했다. 

그래서 박소위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곤혹감에 빠져버렸다. 

양규선에게는.... 규선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오로지 이태리를 꿈꾸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오빠와 함께 무대에 서서 갈채를 받는 꿈에 부풀어 있는 이 티없는 소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석호는 다리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잔잔했던 바다위의 먹구름처럼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왜, 쓸데없이 박소위에게 그런 말을.. 아. 왜 해병대에 지원했던가...빌어먹을.

영웅충동에 사로잡혀서...’     


장석호는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악몽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16.     


핸드폰에서 벌써 네 번이나 연속해서 전화가 울렸다.  

손춘옥은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가끔 학생들이 걸어오는 전화도 있어 세 번 이상 반복하여 걸려오는 전화는 예외로 받아주곤 했다.     


“여보세요.”     


상대방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여보세요. 저 박기춘입니다. 해병대 박소윕니다.”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신미영의 일이 마음에 걸려 시큰둥하게 받았다.      


“네..”     


“저 지금 시간이 되십니까? 잠깐 뵙고 상의드릴 일이 있는데요. 신미영씨 일입니다.”     


내키지 않는 말이었다. 이 자가 수작 부리는 건 아니야? 하지만 미영이 일이라니 모르는 척 할 수도 없었다.        


“어디신데요?”     


“서울입니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서울이지, 진해에서 나를 보자고 한단 말이야?’     


무디고 무식한 군인이라 감각이 영 아니었지만, 단순하고 일직선의 군인이 가끔 귀엽게 느껴지긴 했다. 학교 가까운 카페에서 만난 박소위는 여전히 군복차림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너라고는... 여자를 만나자며 군복차림이라니... 허기사 자기가 군인이니 군복입어야지..’     


애써 관심을 끊었다. 시덥지 않은 인사말들을 하고 나서 그가 말을 꺼냈다. 약간 의외의 말이었다.       


“저, 신미영씨 말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몰라요. 저도 요즘 연락이 안 닿아요.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보죠.”     


“그런데. 장석호 말입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신미영을 영 못 잊는 것 같아요. 이상합니다.”     


“뭐가요?”     


“정상적이라면 의병제대를 해야죠. 그런 중상을 입고 군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직업군인도 아닌 녀석이. 그런데... 의병제대를 포기했단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비정상적이죠. 남들이면 뛸 듯이 좋아하며 제대했지요. 그게 정상이죠. 아닙니까?”      


춘옥으로서는 감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상스런 일은 이상스런 일이다. 성악을 전공한 유망한 테너가수가 그럴 필요도 없는데 군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요?”     


“저는 아무래도 그게 신미영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미영이가 왜요?”     


“신미영이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제대하면 장석호는 약혼했으니 금방 결혼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걸 미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석호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미쳤습니까? 그런 말을 하게. 제가 그렇게 느껴졌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신미영씨를 그렇게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적어도 어디 있는지 소재라도 알아서 두 사람 문제를 어떻게 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손춘옥은 박소위의 말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신미영이 장석호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는 터라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라니요? 신미영씨를 찾아 나서야지요. 그래서 장석호를 치료해 줘야 할 것 아닙니까? 마음의 치료를... 장석호 그 녀석 미친겁니다. 제대를 안 하다니요. 빨리 신미영을 찾아  보세요. 그래야 장석호가 마음을 잡을 것 같습니다.”     


“신미영을 찾아서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요. 장소위는 지금 신미영에게 미쳐있습니다. 틀림없어요. 녀석 저러다 자살할지도 몰라요.”     


“뭐라고요?”     


“자살이 별건가요? 이거저거 다 싫으면 자살하는 거지...”     


“저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협박이라니요....

예. 맞습니다. 협박합니다. 손춘옥씨. 동료를 위해 협박합니다. 장석호를 구해 주십시오.”     


춘옥은 상황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장석호는 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 했다. 사고로 인해 사랑하는 부하들을 잃었다. 자신의 책임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하룻밤을 지낸 여인이 우연히 자신의 간호를 맡게 되고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약혼녀 때문에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다 그 사랑마저 사라진다. 또 상처를 받는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희망도 즐거움도 절단된 상처가 너무 크다. 전쟁에 파견된 군인들이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자살에 이르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왜 군에 남겠다고 하겠는가? 그 심리는 무엇일까? 장석호가 미영을 그토록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결혼을 피하기 위해 군에 남겠다고? 그렇게까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춘옥을 박기춘 소위가 불렀다. 그리고 은근히 말했다.      


“손춘옥씨. 해병대는 말입니다. 남의 꽃을 꺾지 않습니다. 땅에 떨어진 꽃도 줍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손에 쥔 꽃은 절대 놓지 않습니다.“     


춘옥은 커피 잔을 들다 박소위의 말을 들었다. 커피 맛이 달라져 있었다.  

박소위를 바라보았다. 팔각모와 빨간 명찰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군복이 달라보였다.      


“신미영 소식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지요?”     


“저에게 연락주십시오.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또 하겠습니다.”     


박기춘은 자신의 연락번호가 적혀있는 명함을 다시 주었다.

춘옥이 뜬금없이 물었다.      


“IBS훈련은 무사히 잘 끝났나요?”     


박소위는 허를 찔린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예? 예. 이상이 있을 수 없지요. 잘 끝났습니다.”     


“정말 수고하시네요. 그런 훈련을 자주 하시는 걸 보면...몸 조심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기춘은 일어섰다. 다시 춘옥을 향해 차렷하고 경례를 했다.      


“필승.”     


춘옥도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박기춘이 떠나자 춘옥은 박기춘이 준 명함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명함 앞면에는 해병대 마크가 그려진 밑에 ‘소위 박기춘’이라는 이름과 핸드폰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붉고 굵은 고딕 글씨로 한 줄의 문장이 씌어져 있었다.     


‘낙엽은 떨어져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해병은 죽어도 말이 없다.’     


춘옥은 묘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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