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으면 나올 게 없다.
소설가 황석영이 문예창작과를 비판했다. 문예창작과는 글쓰기 기술만 가르치는 곳이라 하였다. ‘소설 쓰는 일도 자신의 세계관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주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탐구하고 그 이야기를 자기화하고 필터링해 내놓는 것이 소설의 기본인 서사이다.’ 또한 황석영은 서사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사가 딸리니까 햇볕이 들어오는 과정만을 묘사한다. 그 장면은 치열하고 섬세하다. 나뭇잎에 비가 어떻게 떨어져서 구르고 떨어지고. 한마디로 주접을 떨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은 요즘 작가들의 체험 강도가 낮다고 지적한다. 기교를 부릴 시간에 내면을 채우라는 소리다.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할에 대해 말할 순 없다. 하지만 황석영이 한 말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내면을 채우라는 메시지다. 치열하게 살고 고민하며 살아온 사람이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깊이가 있었다. 기교만으로 감동을 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비어있으면 나올 게 없다.
나도 이런 이유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름 살아봤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서 고생 좀 했다고 말할 거리가 몇 개는 됐다. 경험이 찬 것이다. 그러니까 글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험만큼 차 있는 게 또 있었다. 관계에 대한 고민이다. 말투 하나하나를 쉬이 넘기질 못했다. 저 사람은 왜 그러는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마인드맵처럼 꼬리를 이으며 왜를 붙여갔다. 고민을 놓지 않으니 신경이 끊이질 않았다. 주변에서 '너무 깊이 생각한다.' '스스로 스트레스 좀 만들지 말라.'라고 했다. 경험과 고민. 과거의 고통이 지금의 글감이 됐다. 이걸 보면 개똥도 약에 쓰는구나 싶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내가 그리 대단한 게 아님을 알았다. 아직도 내 속에 채울 게 많다는 뜻이다. 다양하게 경험할수록 글쓰기 실력도 좋아질 거라 믿는다. 물론 경험만 중요한 게 아니다. 세세한 점이라도 지나치지 않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의미를 살피고 고민해야 한다. 황석영이 서사를 말했듯이, 자기화하고 필터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대충 흘러가는 대로 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이렇게 생각하니 살아볼 만하다. 물론 현실에 한 방 얻어맞으면 곧바로 설설 길게 뻔하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견뎌왔다. 계속 해 보자. 뭐든 지나야 웃을 수 있다. 내 글쓰기도 활짝 웃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