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디지털 개미지옥으로 인도한 그 망할 놈에 대해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적이 있나요?
오늘은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을 소개할까 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저를 이 디지털이란 개미지옥으로 안내했던 한 친구입니다.
제가 지금은 세종에서 잠시 쉬어가고 있지만, 서울에 있을 땐 가끔 술을 먹으며 많은 영감과 응원과 메시지를 받는 굉장히 그런 독특한 인연입니다. 지금 그 친구는 한 언론사에 기획 관련 부장으로 있습니다.
때는 지난 2013년 전후. 저는 한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나이가 같고 이름도 비슷한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보통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스타일이라 낯을 많이 가렸는데 그 친구는 뭔가 좀 달랐습니다.
그냥 잘생겼고. 그리고 목소리도 되게 좋고. 평소에도 그냥 무언가를 탐구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매너도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죠.
확실히 친구가 됐던 사건은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전 별로 수업을 듣기 싫었고 그 친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죠.
"수업도 지겨운데 째고 저기 그늘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 할까"
"그래"
서로 '너도 같은 생각을 했구나'란 웃음을 지으며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과 과자를 사서 강가에 있는 벤치에 앉았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해 사생활까지, 이야기를 할수록 그 친구는 많은 부분이 저와 다르면서도 정서적으로는 또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말해 '사고의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지만 그 친구와 전 성별이 같고 모두 이성을 좋아합니다.
그날 이후 디지털에 문외한이었던 저는 수업 중간중간 쉬는 시간마다 그 친구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디지털, 이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포털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는...
제가 이 친구에게 놀랐던 건 다양한 질문에도 너무 명확하고 진지하게 답을 했다는 겁니다.
당시 유명한 전문가라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이것저것 끌어다가 애매하게 답변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그 친구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챗GPT 4.0이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답변 중 크게 기억에 남는 건 디지털 기획자의 현실과 오디오에 대한 가능성을 언급한 부분입니다.
언론사들이 디지털 기획자를 키우고 영입할 생각은 안 하고 유행하는 틀에 기사를 맞춰 형태만 바꾸면 그만이란, 수동적 행태와 인식 그리고 기획자가 무시당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고사당하는 현실이 한심했던 것이죠.
그러고 보니 1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게 없군요.
그리고 오디오. 저는 그때 오디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습니다.
비디오의 시대에 오디오로 뭘 할 수 있냐는 것이었죠.
근데 그걸 버리면 큰일 난다는 그 친구의 말에 영향을 받아 오디오에 대한 것들을 많이 생각했고
그 영감들을 실제로 많이 받아 실제 기획에 사용하게 됩니다.
글이 별로 재미가 없어지고 있는데,
그 친구를 더 소개하자면 이름도 비슷했지만 일렉 기타를 칠 줄 알고, 와인에 되게 조예가 깊고 술에 섬세(?)합니다.
그 친구에 대한 초기 기억은 이게 전부지만 제가 다른 방송국으로 회사를 옮긴 이후
제가 디지털 기획자로서 본격적인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고, 일이 막힐 때 많은 조언과 칭찬을 아끼지 않은 사람입니다. 정말 진심 어린 말 뿐 아니라 좋은 일이 생길 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그 친구를 생각하며 글을 쓰다 보니,
이 지옥까지 끌고온 인간이라, 뭐, 별로 보고 싶진 않고,
그 여름날 벤치에서 마신 맥주가 생각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