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 Jan 07. 2021

나의 눈썰매 = 누군가의 빙판길

간밤에 눈이 내렸다. 간만에 눈다운 눈이라 아이들과 한참동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난 겨울 탔던 눈썰매가 생각이 난 모양인지 아이가 그런다.


“저기서 눈썰매 타면 어때 엄마!”


나는 그만 신이 나서 쿠팡에서 어린이용 눈썰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땐 눈이 내리면 마냥 신이 났다.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 할 생각에 점퍼도 안 입고 뛰쳐 나가곤 했더랬다.

스무살 즈음엔 설렜다. 맞으며 걸어도 좋았고 라떼 마시며 창밖으로 내다보는 것도 좋았다.

서른살 즈음엔 걱정됐다. 길이 막힐테고, 미끄러울테고, 발이 젖을테니까.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은 행복하다.  눈을 바라보며 신나서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며 그렇다.




엄마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맘카페에선 눈썰매를 구하느라 난리가 났다. 미리 사놓을 걸 후회하는 이들 반, 주문해서 내일 받을거라는 이들 반.

읽는 것만으로도 신나서 방방 뛰는 아이들과 그걸 바라보며 바쁘게 쿠팡을 뒤지는 엄마들의 표정이 절로 떠올랐다. 눈 하나로 다시 크리스마스가 찾아온 기분. 로맨틱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읽은 댓글 하나로 캐롤은 멈췄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 눈썰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들뜬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아서 몹시 조심스럽지만 행여 눈썰매를 주택가나 아파트 단지 내 인도에서 타시면 안될 것 같아요. 썰매가 눈을 압착시켜서 빙판이 되고 제설도 훨씬 힘들어진다고 해요.


아차 싶었다.

아이들이 썰매를 탈 수 있는 곳이야 뻔 했다. 인적이 드문 시간에 단지 안 약간의 경사가 있는 인도를 찾아봐야겠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우리 모두는 눈이야 소복소복 사뿐사뿐 쌓이지만 누군가 꾹꾹 즈려 밟으면 머지않아 두텁고 미끄러운 빙판이 되다는 그 상식을 잊고 있었던 거다. 그 위에서 깔깔거릴 아이들의 행복에 취해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뒤지던 쿠팡을 조용히 덮었다. 이제 들떠 잠든 아이들에게 내일 아침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할 차례다.


근데 며칠 전 화상 회의를 하며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그만 생각이 다른 길로 새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건 사실 눈썰매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줌으로 미팅을 하고 있었다. 신입사원들끼리 하는 OT 성격의 미팅이라 활기가 넘쳤다. 넉살 좋은 A가 마이크를 잡아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동기 B가 채팅창으로 농담을 던졌다.


아우 고막이 녹아버릴 것 같아~ 고막 멜팅 장인~~

채팅창엔 ㅋ으로 홍수가 날 지경이었지만 나는 순간 식은 땀이 흘렀다. 미팅 참여자 중엔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이가 있었다. 구글에서 제공하는 텍스트 변환기는 방금 그 말도 여지없이 전했을 게 분명했다.

차마 그의 표정을 살필 용기가 없었다.


남은 미팅 내내 곱씹었다. 많은 이들을 웃게 하는 누군가의 넉살, 누군가의 농담이 또다른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구나.


로맨틱한 눈썰매가 만든 빙판길처럼.




나이를 한살한살 먹어가며 그동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때론 대놓고 반박했던어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울린다. 되바라진 딸의 반발에 "너도 살아보면 알거야."하며 방으로 들어가시던 엄마의 마음도 알겠다.


벌써 20년 쯤 전인가. 원하던 대학에 합격 통지서를 받고 기뻐 방방 뛰는 내게 엄마는 조용히 그러셨다.

"우리  축하해. 그런데 학교에서는 너무 좋은  내고 그러지 말어."


친구들의 불안과 좌절을 이해하고 조심하기에

나는 고작 18살이었다. 수년 간의 노력이 제대로 축하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입이 펠리칸처럼 나와 며칠동안 방문을 쾅쾅 닫던 내가 떠올랐다.


내게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겐 이기적인 경거망동이었을.




나이란 걸 먹을수록 맞아본 눈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같이 사는 것이고, 같이 살기 위해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불편과 불안을 같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눈썰매는 눈썰매장에서 타는 걸로.

우리 딸도 20년 쯤 지나면 알겠지.

"딸, 너도 살아보면 알거야."

작가의 이전글 정인이에게 하는 약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