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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포 Mar 23. 2020

인생의 몇 월을 살아가고 있는가

어느 시인은 11월을 두고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고 썼다. 언제 쓰였는지 모를 시의 한 구절이 오늘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마치 그 시인이, 그 시인의 시가 담긴 시집이, 그 시가 담긴 시집을 읽는 햇살 좋은 오후가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너는 지금 인생의 몇 월을 살아가고 있냐고.


인생을 계절이나 시간에 비유한 표현들은 종종 들어왔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움직이기는 처음이다. 인생은 유한하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내게 주어진 인생의 몇 월을 살아가고 있을지 생각해본다. 


머릿속에 1부터 12까지의 숫자 퍼즐을 늘어놓았지만 이거다 싶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잔머리를 굴려 선택지를 4지선다형으로 줄여본다. 보통 사계절을 기준으로 봄은 3~5월, 여름은 6~8월, 가을은 9~11월, 겨울은 12~2월로 나뉜다. 그러니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인생의 계절을 알면 좀 더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먼저 나는 주어진 삶의 3~5월은 이미 지낸 듯하다. 봄은 따스한 기운이 돌아 새싹이 트는 시기로, 내 인생의 유년 역시 봄이 아니었다면 무엇일까. '비교적 안정된 여름이나 겨울에 비하면 날씨 변화가 심하고... 등 기상이 상당히 복잡한 시기'라는 백과사전의 설명만으로도 내가 지내온 유년과 참 많이 닮았다.


그렇다고 가을은 아닐듯하다. 서른의 끝자락에 내몰렸지만 아직은 끈질기게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적어도 인생의 가을이라면 마흔은 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럼 나는 지금 6~8월에 해당하는, 봄과 가을 사이의 여름쯤을 살아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보니 내가 인생의 몇 월에 서있는지 답에 좀 더 다가간듯하다. 그렇다면 6~8월 중 몇 월일까?


밤나무 꽃 피는 6월은, 누구라도 생에 가장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는 시기다. '젊음'과 '혈기'란 단어가 어울리는 나의 20대 시절과 닮았다. 유년을 보내온 봄의 '온기'가 축적되어 '열기'가 되는 시기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받아온 보호에서 벗어나 갓 성년을 맞이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머리보다는 가슴이,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섰던 날들. 일도 사랑도 효율보다는 열기가 중요하다고 믿었던 시간들이다. 이렇게 그 시기를 차분하게 돌아보게 되는 걸 보면 이미 나는 인생의 6월도 다 지낸 듯하다.

장마가 한창인 7월은, 서로 다른 성질의 공기가 만나 힘겨루기를 하며 수시로 비를 뿌려대는 시기다. 인생의 7월 역시 이상과 현실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시기다. 뜨겁게 더욱 뜨겁게 꿈의 온도를 높이고 싶지만 오히려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깨달아가는 시기. 뜨겁게 꿈꿔오고 차갑게 식어가기를 반복하며 삶을 담금질하는 시기다.


그러고 보니 7월이 맞겠다 싶다. 나는 인생의 7월을 한창 보내고 있는 중이다. 날이 좋으면 뜨거운 땡볕 아래서 땀 흘려 일해야 할 걱정이 앞서고, 장대비 같은 문제들은 기약도 없이 수시로 내린다. 한두 번쯤은 태풍이 불어닥쳐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꽤나 고단하고 긴장된 7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의 추수를 기대하며 멈추거나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7월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8월까지 마저 버티고 견뎌내며 9월을 맞이하면, 정말 내 인생에 풍성한 추수의 시기가 펼쳐질까. 그보다 더 앞서 내가 정말 거두기를 바라는 인생의 결실은 무엇일까. 평범한 삶이 희망사항이 되어버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 내가 지금 7월의 뙤약볕과 비바람을 견디고 있는 이유일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9월과 10월을 맞이하지 않고 싶다. 내게 주어진 열두 번의 계절을 모두 7월로 산다고 해도 오직 나만의 이유로 폭풍에 맞서서 살아보고 싶다. 그렇게 다 젖어도 잠시 말리고 다시 또 젖는 것만이 진정한 내 삶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 믿음으로 굳건하게 내 인생의 7월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비록, 11월 즈음이 되어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을 맞이했다고 되뇔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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