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거창한 인류애 따윈 없다. 그저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을 뿐이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아프리카 해외봉사를 떠났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던 분야였습니다. 저의 엉뚱한 선택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제 주변에서는 '취업은 안 하냐' 혹은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냐'는 가시 돋친 말 대신 '장하다', '멋지다' 등 민망한 표현으로 저를 추켜세워 주셨습니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아프리카(그중에서도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으로 가는 해외봉사를 굉장히 고결하고 따듯한 인격을 가진 이들이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프리카 해외봉사하면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완성형 인격체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제가 우간다로 뛰어들기 전까진 말입니다.
이 분야에 계시는 고결한 분들께는 송구스럽지만 제가 해외봉사단원으로 우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유는 인류애도,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있어 보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이십 대 후반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취업 관문 아니면 사회 초년생의 고충과는 다른 차원의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그 모습이 막연히 멋져 보였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처럼 제 자신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쓰기도 민망한 이런 유치한 동기가 결국 절 이 지경으로 내몰았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멘토들이 '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말라'는 메시지를 쏟아내는데, 저는 이와 반대로 남의 시선에서 멋져 보이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심하게 흔들리는 사람이죠.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팔랑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이 멋있다고 하는 걸 꼭 내가 해서, 그 멋지다는 말을 듣는 주체가 되길 희망합니다. 물론 그 멋의 기준이 간혹 타인에 의해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은 단점이겠지만요.
저는 남들 눈에 멋져 보이고 싶어 하고, 팔랑귀라는 제 성격을 그다지 바꾸고 싶진 않습니다. 저같이 아큐식 정신승리를 일삼으며 게을러지려고 애쓰는 사람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기질이라도 없었다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살았을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저를 최소한으로 채찍질해주는 마지막 장치가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은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동기가 제 인생에서 큰 역할을 한 적이 꽤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대입이었습니다. 처음 응시한 수능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후 가고 싶은 대학과 전공에 재도전할지, 다른 일을 할지 고민이 많았던 시기에 제 생에 첫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어느 대학교 근처에 있는 크지 않은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돈을 벌어보는 경험을 했습니다. 영화 관람을 마친 손님에게 손을 반짝반짝하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귀엽게 인사드리는 그 일이 처음엔 몹시 어색했지만 점차 적응도 되고, 성인으로서 돈을 벌 수 있는 게 재미도 있었습니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인사를 한 저보다도 그 인사를 받았던 손님들이 저를 보면서 더 민망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타성에 젖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와 마주했습니다.
"369번 손님!"
번호표를 들고 온 손님은 다름 아닌 제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놀랐습니다. 원래 그 친구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고, 목표로 했던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 친구와 마주치니 갑자기 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너 여기서 뭐해?" 당황한 그 친구는 정말 말 그대로 여기서 뭐하냐는 의도의 물음을 제게 던졌습니다. 그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다르게 들렸습니다. 그땐 그 말이 '너 대학 안 가고 뭐해'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제가 가고 싶은 대학과 전공에 대해 노래를 부르고 다녔기 때문에 괜히 꼬이게 들렸던 것입니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그 친구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간신히 상영관을 안내해주었습니다.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게 부끄럽고 민망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을 가서 뭐를 하겠다는 둥 어지간히 큰소리치고 다녔던 제 과거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되게 구려 보일 것 같았습니다.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동기 중 하나는 그 친구에게 구려 보이기 싫었던 것도 있었습니다. 그다지 내키진 않지만, 목표로 했던 대학 학과에 입학해 졸업을 하기까지 그 공로의 일부분은 그 친구에게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우간다로 해외봉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의욕이 떨어졌던 시기를 꼽으라면 당연히 제가 장티푸스에 걸렸던 6월입니다. 한국에서는 걸리려고 노력해도 걸리기 어려운 병을 이곳에서 만나 한바탕 병치레를 치르고 나니 의욕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특히 제 의욕이라는 녀석은 뚝배기와 냄비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예민한 녀석입니다. 의욕을 끌어올리기는 건 뚝배기처럼 어렵지만, 의욕이 사그라드는 건 냄비가 식듯 순식간입니다. 이런 제 의욕에 장티푸스가 한바탕 휘젓고 갔으니, 뭔가 뜨거울 일말의 여지조차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연락도 안 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고 심지어 결혼까지 해서 정신없을 텐데, 그 영화관에서 조우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제 브런치에서 장티푸스 걸린 글을 봤다며 걱정하는 듯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아직 장티푸스가 다 낫지도 않은 제게 대뜸 3만 불짜리 프로젝트를 기획해 우간다에서 꼭 의미 있는 기여를 하길 바란다며 저를 압박했습니다. 이 친구는 직업 특성상 코이카 업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보니 이런 압박이 가능했습니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인 현장사업은 단원이 근무하는 기관이나 지역사회를 위해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현장사업을 기획하고 해당 계획을 코이카에 승인받으면 최대 4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현장사업은 단원의 선택 사항인지라, 모든 봉사단원이 현장사업을 진행하진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봉사단원으로서 의미 있는 일임은 분명하지만 장티푸스에서 낫고 있는 중인 사람에게 현장사업을 내놓으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 친구가 새삼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보통은 그냥 "너 건강만 신경 써" 정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뭐 저런 애가 있나 싶다가도, 그냥 별 것 없이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남들이 어떻게 볼지 고민해봤습니다. '있어 보이는' 행보는 아닐 것 같았습니다. '현장사업은 건드려 보자'라는 막연한 결심을 했습니다. 남들에게 있어 보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제야 이들에게 뭐가 필요할지,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혈혈단신으로 사람을 만나고, 발품을 팔고, 업체를 알아보고, 견적서를 받고, 설득을 하고, 가끔은 싸우기도 마다하지 않는 이런 숱한 과정들이 켜켜이 쌓였고 끝내 제가 파견된 PMM Girls' School의 운동장 환경 개선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코이카에서 3만 달러 규모의 이 사업을 승인했고, 며칠 뒤 첫 삽을 푸게 됩니다. 요즘 글이 뜸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당분간은 준비 과정에서 겪었던 시트콤 같은 이야기와 앞으로 겪을 황당한 이야기들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뭔가에 관심이 생기고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내가 왜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왜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한번 들여다보세요. 그다음 내 안의 유치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거나 부끄러워하기보다 그것이 앞으로 무엇이 될까, 끝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요? 지치고 힘든 과정에서 오히려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어주지 않을까요? 그러니 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의 그 마음이 그저 그런 유치함이 아니라 '위대한 유치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 한동일 <라틴어 수업> 중
남들에게 있어 보이겠다는 유치한 동기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저조차도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