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일곱 시. 학교 담장 너머 우리 집까지 설레는 기운이 잔뜩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운동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얼굴에서 생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날입니다. 이제 이곳에 산 지 6개월 정도 되었지만 여전히 신기한 것들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운동회는 학생들에게 내재된 텐션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특히 더 기대되었습니다. 집을 나오자마자 학교의 들뜬 공기가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집에서 학교로 가는 30초가량의 거리는 웅성거리는 소리로 꽉 차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본 우리 집. 담장만 없으면 5초 컷
먼저 제가 근무하는 PMM Girls' School의 운동회 시스템을 알기 위해선 House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 학기가 시작하고 학생들이 자꾸 제게 "Where is your house?"라는 질문을 해서 '근처에 산다'는 대답을 했고, 본의 아니게 학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House는 팀의 개념입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그리핀도르, 슬리데린, 레번클로, 허플퍼프처럼 기숙사에 따라 팀이 나뉘는 것처럼 말입니다. PMM 학교 역시 네 개의 house가 있고 교사들 역시 House에 속해 있는 겁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기를 쓰고 선생님들의 House를 궁금해할 수밖에요. 전후 사정을 알고 나니, 제게 House를 물어본 학생들을 사생팬처럼 취급한 것 같아 다소 민망했습니다.
House별로 다른 색깔의 반바지를 입고 있다
우리 같은 경우 교장선생님이 일어나서 "지금부터 제 00회 00학교 운동회를 시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으로 운동회가 시작되는데, 이곳은 운동회 시작을 알리는 스케일이 남달랐습니다. 전교생이 정문 앞에 House별로 서서 행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행진은 진자 시내 한 바퀴를 돌고 오는 것인데 house 플랑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걷는 학생들의 텐션은 흡사 우간다 무세베니 대통령 퇴진 시위를 연상시킬 정도였습니다. 시내 반 바퀴를 도니 교장선생님이 브라스 밴드와 함께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PMM 전사들은 브라스 밴드와 경찰관 호위를 등에 업고 진자 시내에 자신들의 운동회를 있는 힘껏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진기한 풍경이었는지,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학생들의 행진을 구경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진기한 풍경은 그 행진에 무중구(피부 하얀 사람) 한 명이 껴있다는 사실이었을 겁니다.
시내 한복판을 활보하는 학생들의 텐션. 시내 근처에 사는 동료 단원은 우리 행진 때문에 아침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브라스 밴드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학교로 돌아오니 DJ가 빵빵한 음향 기기와 함께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들 역시 운동회 준비를 마치고 부스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식순에 의거해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애국가, 부소가 지역 노래, 교가, 심지어 House별 노래까지 듣느라 20분은 소요된 것 같습니다(여담이지만 제가 우간다에 와서 뿌듯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우간다 애국가를 부를 줄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본격적인 운동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학교 운동회에 DJ. 다양한 노래를 틀어줬는데, 자신이 리믹스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남스타일도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여러 학교의 운동회 사례를 들어 종합해보건대, 우간다 운동회는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운동회는 2인 3각, 박 터뜨리기, 줄다리기 등 단합과 재미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이곳의 학교 운동회는 고대 아테네에서 열렸을 법한 올림픽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3000m, 1500m, 800m, 400m, 200m, 100m, 창던지기, 원반 던지기, 투포환 등 거의 모든 운동회 종목이 Track & Field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육상의 경우 달리기를 잘하는 학생이 앞서 열거한 전 종목에 출전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학생에게는 살인적인 스케줄입니다. 깜빡하고 제가 빼먹었는데 계주 달리기 100m X 4, 400m X 4까지 더한다면 탈진하고도 남습니다. 심지어 짧은 레이스의 경우는 heat와 final까지 있어서 달리기를 잘하는 한 학생은 이 날 7200m를 전력으로 달렸습니다. 실제로 달리기 시합 도중 잠깐 기절하는 학생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저는 걱정했는데 정작 이곳 학생들과 교사들은 그리 크게 신경 쓰진 않는 것이 더 놀라웠습니다. 다행히 그늘에 뉘어 놓고 부채질을 해주니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원반 던지기 현장
저는 얼떨결에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봤습니다. 갑자기 마이크를 쥐어주더니 다음 종목에 대한 공지 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다가, 줄곧 사회를 봤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경험이 꽤 값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사회를 본 경험이야 몇 차례 있지만, 영어로 사회를 보는 기회를 얻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아니니 더더욱 그런 기회가 제게 오기 어려운데, 운동회 사회를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감사했습니다.
가장 눈길이 갔던, 그리고 제가 아는 수준의 운동회스러웠던 종목은 '마토케 껍질 벗기기'였습니다. 마토케는 바나나처럼 생긴 이곳 사람들의 주식(staple) 중 하나입니다. 초록색 바나나이지만 단맛은 전혀 없습니다. 제 이목을 끌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이색적인 종목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180도 돌변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DJ가 틀어주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트월킹과 아프로 댄스를 추다가 마토케 껍질 벗기기 시간이 되니 무릎을 꿇고 우간다 전통 의상을 입은 채 칼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트월킹을 신나게 추는 모습과 얌전히 마토케 껍질을 벗기는 모습을 넘나들 수 있는 학생들이 신기하면서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방금까지 트월킹하다가 온 분들
우간다에서의 삶의 특징 중 하나는 적응했다 싶을 때 신선한 충격을 준다는 점입니다. 시상식과 귀빈 말씀으로 운동회가 끝마칠 때쯤 그 충격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귀빈이 학생들 앞에 나와서 한 말씀하는 그 시간에 DJ가 입장곡을 틀었는데, 나오는 사람들마다 DJ의 비트에 맞춰 춤을 췄습니다. 교장선생님도, 시의회 공무원도 모두 한참 어르신들인데 그들이 지닌 흥은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 귀빈들이 눈에 띈 학생을 앞으로 불러 자신의 주머니에서 쌈짓돈 20000실링(대략 7000원)을 꺼내 줬습니다. 상금이 아니라 용돈 주듯이 주는 모양새에 저는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그때만큼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순간도 없었습니다.
춤도 춰야 되고 상도 줘야 하고 훈화 말씀도 해야 해서 바쁜 교장선생님
운동회가 공식적으로 끝나도 DJ와 음악이 남아 있을 때까지 학생들은 운동장을 떠나지 않고 한참 동안 춤을 췄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가도 여전히 운동장에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실제로 그때까지 학생들이 춤을 췄는지, 제 마음속에서 그들의 흥이 떠나지 않고 자리 잡고 있어서 그랬던 건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종에 따른 유전적 차이를 일반화하는 사고를 극도로 배척하지만, 트월킹에 있어서는 내 신념을 잠깐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