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널드 May 15. 2019

해외봉사활동, 이렇게 하면 실패합니다

망치를 쥐고 있으면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

망치를 쥐고 있으면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


욕구 이론으로 유명한 애이브럼 매슬로우가 제 뼈를 강하게 때린 말입니다. 저는 망치 하나 쥐고 있으면서 모든 문제를 못으로만 보려는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얄팍한 대안에 굳이 문제점을 끼워 맞추는 것이죠. 언론고시 준비한답시고 논술 쓸 때도 딱 그랬습니다. 어쩌다 칼럼이나 다른 해외 다큐멘터리에서 제 심금을 울린 해결 방안이나 대안을 발견하면 그 주제에 있어서는 논리적 구조와 상관없이 무조건 대안에 맞춰서만 쓰려고 했습니다. 이 버릇은 어디 안 가고 우간다에서도 고스란히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같이 우간다로 파견 온 선생님 중 한 분이 면 생리대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계셨고, 그걸 배워 이들에게 면 생리대 제작 교육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우간다 땅을 밟기도 전에 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면 생리대라는 망치는 묠니르가 아니었고, 우간다의 문제는 못이 아니었습니다.  

우간다라고 다 왼쪽의 모습은 아니다

면 생리대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하는 게 만병통치약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라 함은 저소득 국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제 자신에게 있을 것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책으로 찔끔 본 아프리카에서 여성의 기본권은 언제나 비참했고, 그들은 언제나 할례에 대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으며, 생리 기간 중에는 집 밖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문화(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도 있었습니다. 일회용 생리대를 매번 구입하는 것은 한 가정에 최소 세네 명의 여성이 사는 상황에 매우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거죠. 실제로 우간다 몇몇 병원에서 의사들과 이야기해보니 '일회용 생리대를 구입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보니 수건이나 천을 대고 있는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습니다. 의사의 사운드바이트까지 땄으니 바로 착수해야겠다는 의욕이 불탔습니다.


방수천 탈부착이 가능한 혁신적인 면 생리대였다

일단 150km 정도 떨어진 음발레에 면 생리대 제작 노하우를 잘 알고 있는 동기 선생님을 뵈러 갔습니다. 손끝에서 야무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제가 꾸역꾸역 박음질을 하고, 다소 큰 고사리 손으로 날개 모양을 잘라내는 등 팔자에 없던 생리대 만들기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성 인지 교육을 어떻게 구성할지, 어느 학교에서 교육할지, 날짜는 어떻게 협의할지 등을 논의하며 단원들과 서로의 의욕을 고취시켰습니다. Parents & guardians를 대상으로 면 생리대 제작 교육 및 생리에 대한 기본 교육을 하는 것을 주제로 최종 합의했습니다.

미대 출신인 어머니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매우 집중하고 있는 왼쪽 엄지발가락(2019.05)

하지만 정작 기관에 돌아와서 내 계획을 말하고 세부사항을 조정하려는데 걸림돌이 매우 많았습니다. 첫 번째로 미리 날짜를 협의하지 않았던 탓에 주말 동안 부모님을 초청하는 행사를 잡기 어려웠습니다. 우간다 학제 상 두 번째 학기인 5월 말 ~ 8월 말에 대부분 학교는 여러 행사를 진행합니다. 학교 운동회, 부모님 초청 행사, science fair 등 매 주말마다 행사가 잡혀 있었습니다. 학교장과 기관 사람들은 대부분 협조적이라 제가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나 제안에 언제나 긍정적이지만, 꽉 차 있는 주말 행사에 또 주말 일정을 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건, 대부분 학생들이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 지레짐작과 의사의 사운드바이트는 '학생들이 면 생리대를 필요로 할 거야'라는 제 확증편향을 강화시키는 역할만 했던 거죠. 학교 시니어 우먼(women's stuff를 담당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생리대 걱정을 심각하게 하는 학생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우간다 대부분 지역, 특히 북부 지역의 경우 여성들의 면 생리대 수요는 굉장히 높겠지만 이곳은 다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간다 역시 지역 간 소득 격차가 심한데, 제가 파견된 진자 지역은 우간다 내에서도 사정이 매우 좋은 편입니다(우간다 내 지역별 소득 순위 Top 5). 시니어 우먼 선생님은 학생들 대부분 일회용 생리대를 착용하지만 제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며 다소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직접적으로 타깃의 니즈를 파악하는 선행 작업 부재했던 패착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죠.


이 사달이 난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삶의 본질'을 건드리고 싶다는 거창한 목표 의식이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쓸데없이 거창한 걸 좋아하는 취향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한 번에 대단한 걸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하는 협력활동이나 현장 사업은 당장 이곳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삶의 기본적인 지표를 개선할 수 있는 무언가여야만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생리로 인해 여성들이 삶을 영위하는데 제한이 있을 것이니, 면 생리대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면 삶의 본질을 좀 더 낫게 해 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1. 직접적으로 타깃의 니즈를 파악하자

2. 그 니즈를 바탕으로 대안을 구상하자

3. 거창해지려고 하지 말자

4. 내 고정관념에 타깃을 끼워 맞추지 말자


정리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수도 없이 들었고, 수도 없이 본 뻔한 문장들입니다. 경영 마케팅 서적에서 입이 닳도록 나온 말이지만, 겪어 봐야 비로소 그 뜻이 뭔지 알게 됐습니다. 이곳에 온 지 곧 반 년이 되어가는데, 제가 한 일이라곤 제 안에 내재된 저소득 국가의 스테레오타입을 한 꺼풀 벗겨내고 제 손에 쥔 망치를 내려놓은 게 전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간다에서 첫 학기를 마무리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