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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Jul 02. 2019

흑인들과 달리기 시합하면 몇 등이나 할 수 있을까

차이가 많이 벌어질 경우 일부러 넘어지는 시나리오를 채택하기로 했다

출발선 앞에서 상체를 숙였다. 100m를 전력으로 달려야 한다. 환호성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8년 만에 100m를 뛴다는 부담감인지, 내 옆 레인에 서 있는 사람들 중 나와 같은 피부색이 없어서인지, 쏟아지는 학생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살짝 긴장되기도 했다. 출발 휘슬이 들리기 전까지 5명의 선수들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단한 전운이 감도는 것 같지만 사실 내가 근무하는 PMM Girls' School의 운동회 이벤트 게임인 교사 레이스다. 스포츠가 웃긴 게 국제대회를 뛰든 학교 운동회 이벤트 게임을 뛰든 사람을 긴장시킨다는 점이다. 출발선 앞에 선 다른 선생님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 보이길래 나 역시 애써 태연한 척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선생님들이 첫 번째 출발 신호가 들리기도 전에 우르르 뛰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그들 역시 매우 긴장했다는 걸 알았다.

이 정도 텐션의 학생들이 고함을 지른다.

두 번째 출발 신호와 함께 숨 막히는 레이스가 시작됐다. 단언컨대 스타트 반응 속도는 내가 1등이었다. 쾌조의 스타트는 불과 20m를 버티지 못했다. 이후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열심히 뛰느라 바빴고, 나보다 30cm는 더 작은 영어 선생님이 치고 나가는 탄력에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후 100m 지점에 통과했을 땐 5명 중 간신히 3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레이스가 101m였으면 4등이 될 뻔했다는 이야기다). 어지간히 공들여 뛰었다는 걸 느낀 게, 팔을 어찌나 뒤로 치며 뛰었는지 불과 13초 만에 활배근과 광배근이 당겼다.



달리기는 한때 내 콤플렉스였다. 운동의 기본은 달리기인데, 이 명제에 따르면 나는 운동하는 사람으로서는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놈이다. 근섬유와 세포가 급격하게 양적 성장을 하는 13세 경에 달리기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 나처럼 느린 발로 태어난 사람의 경우 - 단거리 달리기 기록 단축이라는 꿈은 현실적으로 도달하기 쉽지 않다. 이 사실을 안 건 대학 입시를 준비했을 때였다. 사실 느리다는 이유로 설움 당하는 경우가 인생에 몇 번이나 있겠냐마는, 내게 주어진 것도 아닌 걸 성취하려다 보니 어지간히 서러웠다.


느린 발로도 운이 좋게 좋아하는 체육을 대학에서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래도 설움은 끝나지 않았다. 공식적인 육상 트랙에서 처음으로 100m를 달려 13.6초라는 기록을 받았다. 40명가량 되는 대학 동기들 중에서 100m 달리기 기록이 뒤에서 다섯 번째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뒤 네 명은 무용을 전공한 여자 동기들이었다. 이 말인즉슨, 내 앞 순위에 당연히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하지만 당시 받은 충격으로 내 사고 체계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었는데, 세상에 나보다 신체적으로도 강한 여성이 많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학교에서 가장 어리고 조그마한 학생이 이를 악물고 뛰었다. 흡사 나이키 광고 같은 그녀의 뒷모습.

이런 건 비단 달리기 뿐만은 아니었다. 체육을 전공한다고 해도 모든 운동을 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긴 어렵다(까마득한 선배들의 구전 설화로만 들어봤다). 하지만 보통은 체육을 전공한 사람은 운동신경이 좋아 운동을 두루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보통의 기대감을 충족시킬 만한 운동신경을 갖추고 있지 못했는데(다른 전공자들보다 특히 더), 이는 자기 착취로 귀결됐다. 내가 원래 잘할 수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의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운동은 내게 후자였다. 운동을 다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운동을 두루 잘하기 위해 (애는 썼지만) 엄청난 노력을 투자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마음만 아팠다.


못하는 걸 못한다고 인정하기까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이런 사실을 완전히 승복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자신에게 속이 상하기도 한다. 못하는 걸 못한다고 인정하는 게, 다른 이들의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잘하는 척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과거엔 반대로 생각했지만 말이다. 결국 모든 걸 잘 해내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이 커지는데 그 굴뚝을 잠재우기 참 어려웠다. 그러니 누군가 내게 생각보다 잘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면 편하게 받아들이기보단 화부터 났다.


그래서 잘하고 싶은 것과, 잘 보이고 싶은 것을 구분하기로 마음먹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나쁜 것도, 잘하고 싶은 열정이 순수한 것으로 추앙받을 필요도 없다. 어떠한 가치 판단도 없이 그저 구분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다. 이런 구분은 나를 한결 편하게 만들어줬다. 내가 원하는 대부분은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닌 잘 보이고 싶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다른 이의 눈치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졌다.



100m를 완주하니 학생들이 나를 보며 '피곤했냐', '왜 못 뛰냐'는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학생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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