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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Mar 09. 2019

난생처음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봤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승자와 패자 모두 다칠 수밖에 없다 

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참으로 많이도 써왔다. 소위 언론고시 바닥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체화했던 것 같다. 논술 혹은 작문에서 많은 언시생들은 관성적으로 이 표현을 쓴다. 애초에 불리한 환경, 공정할 수 없는 사회 구조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만큼 찰떡 같이 표현하기도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우리에게 '유니콘'과 다를 바 없는 말이다. 우리는 평평한 운동장에서만 뛰어봤고, 놀아봤을 뿐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실제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최소한 나는 그랬다).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본 적도 없지만 말로만 회자되는 표현. 우리나라에는 말 그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많이 말하고 다녔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이 정말 어떤 불공정과 비상식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응원 열기만큼은 뜨거운 우간다 소녀들. 나뭇가지는 응원도구다(2019.03.08)

우간다에는 기울어졌거나 울퉁불퉁한 운동장이 대부분이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봤고, 처음으로 학생들과 함께 축구, 배구, 넷볼도 했다. 실제로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사회 현상으로서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무슨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도 '급'이 있다

"우리 운동장은 흙인데, 거기 운동장은 잔디네요." "거기 운동장엔 축구 골대 있던데, 여기는 나무로 된 골포스트가 전부네요." 우간다에도 수많은 상태의 운동장이 있다. 처음 기관에 파견됐을 때 단원들끼리 알게 모르게 기관에 대한 비교를 하게 된다. 시설이 얼마나 좋은지, 혹은 얼마나 낙후되었는지이다. 낙후된 기관으로 파견된 단원은 막막함과 좌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골포스트가 다소 자연스러운 편

솔직히 말해서 내 기관은 우간다 내에서 비교하자면,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넓은 잔디 운동장은 한국에서도 보기 힘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본질은 내가 일하는 기관의 운동장 역시 기울어져있고, 울퉁불퉁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려 할 때면, 꼭 반대급부의 목소리가 들리기 마련이다.  "더 힘든 곳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교사, 학생도 있는데 그 정도면 양반이지" 따위의 말이 대표적이다.


사회라는 운동장 자체가 기울어져 있을 때 들리는 목소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잘못됐다는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면, 꼭 반례가 등장한다. 그 반례는 그 상황을 이겨낸 개인이거나 그 상황보다 더 힘든 상황을 이겨낸 극소수의 개인이다. 개천에서 난 용 한 마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비합리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은 입 닥쳐야 할 징징거림이 된다. 취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 아이를 낳기 두려운 이유가 혹자에겐 변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게 되곤 한다. 이처럼 우리는 합리적 비판이 징징거림으로 바뀌는 순간을 사회적으로 수도 없이 목격하는 중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누구나 다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운동장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졌는가'이다. 실제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보면, 어느 쪽으로 골대로 기울어졌는지가 경기의 유불리를 결정하는 요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축구한다는 것 자체가 그곳에서 축구하는 모든 이를 다치게 한다는 점이다. 내리막길을 뛰다 보니 발목이 돌아가기도 하고, 공이 제멋대로 튀다 보니 상대의 발을 차기도 한다. 우리 팀이 내리막 골대로 공을 차 넣어야 하든, 오르막 골대를 지키고 있어야 하든, 그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학생은 모두 부상의 잠재적 위험성을 안고 뛰는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그곳에 있는 모두를 다치게 한다는 이 자명한 명제를, 직접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내몰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경쟁과 승부에만 천착하게 된다. 승자와 패자는 정해지지만 모두 다 다치게 된다. 과도한 승리지상주의는 성과주의로 귀결되고, 이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것을 허락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패배를 어떻게든 승리로 만회하고자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찾아 이겨내고야 만다. 나보다 높은 학벌로 인해 받은 상대적 박탈감을 나보다 낮은 학벌을 지닌 사람을 보며 위로받는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무시하고, 대기업 비정규직은 중소기업 직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달랜다. 아큐식 정신승리에만 급급하다 보니 극소수의 기득권을 제외하면, 모두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왜곡된 사회 구조로부터 왜곡된 인식을 내재화하도록 강요받는다.

맨발로 뛰는 학생이 대다수다 보니 부상 위험은 더 커진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꾸려는 것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더 급하다. 그러니 기울어진 운동장은 쉽게 '나라시'되지 않는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나라시 되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이상 누구도 사회로부터 부상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다치진 않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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