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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Aug 19. 2019

유치함이 쏘아 올린 작은 공#2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곳에서 뭔가 해보려고 애쓰는 것

집 앞 작은 슈퍼에 쇼핑을 하러 나가기 두려워서 여러 번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보통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의 첫 심부름 명령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는 쉽게 졸업하는 감정인데, 불과 8개월 전에 저는 초등학교 1학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습니다. 우간다는 저를 겁 많았던 2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하기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우리집 앞 마켓. 이곳에 처음와서 당당하게 쇼핑 가능하신 분?

그러니 다른 NGO에서 일하시는 분들이나 이곳에서 먹고사는 교민들을 보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식당에서 점원을 보고도 한 마디도 못하는 꼬맹이가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문은 해야 하는데 점원에게 말을 붙이기 긴장돼서 엄마 뒤로 숨어버리는 그런 꼬맹이가 8개월 전 딱 제 모습이었습니다. 주문을 기가 막히게 해내는 엄마를 바라보는 꼬맹이의 시선. 아마 그게 그분들을 바라보는 제 시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20년 전 제 모습과 지금의 제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마 체면의 무게인 것 같습니다. '있어 보이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 '숨어버리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조금은 앞서는 겁니다. 이 유치한 동기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곳에서 그래도 뭔가를 해보려고 애쓰게 된 이유입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코이카 봉사단원 자격으로 제가 근무하는 PMM Girls' School의 운동장 환경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한 겁니다.



일단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선 코이카로부터 예산을 따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왜 진행해야 하는지 코이카를 설득하는 것이 그 첫걸음인 셈입니다. 제가 제안하는 현장사업(프로젝트) 계획서를 통해 코이카가 타당성을 평가하고 사업을 허가합니다. 얼핏 보고서만 쓰면 되는 작업인 것 같지만 실상이 그렇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먼저 운동장 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이유와 명분이 확실히 필요했습니다. 단순히 운동장 사진 몇 장으로 설득된다면 예산을 너무 쉽게 쓰는 거니까요. 물론 제가 볼 땐 운동장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럽지만 말입니다. 다소 번거롭고 귀찮아질 거란 걸 알면서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현재 운동장에 대한 만족도 설문조사를 시행했습니다. 운동장 시설과 휴게 시설, 부상 우려 등에 대한 질문을 넣었습니다. 이곳 운동장은 평탄화가 되어 있지 않아 중간중간 구멍이나 언덕이 있어 부상을 초래할 위험이 큽니다. 축구 골대와 배구 포스트는 나무를 잘라 붙여 만들었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맨발로 뛰어다니기 때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많았습니다.

페널티킥 차야 하는 우리 학교 아이들 1인칭 시점
사람들은 정략적 정책 분석을 흔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로 여기지만, 사실 계산기는 우리가 무슨 계산을 하고 싶은지를 따진 뒤에야 비로소 동원되는 것이다.
- 조던 앨렌버그 <틀리지 않는 법> 中

설문조사를 만들다 보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내 생각보다 만족도가 높으면 어쩌지?' 사실 설문조사 혹은 통계자료를 만드는 작업은 내 가설에 부합하는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려에 한 번 잠식되니 걱정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곳 친구들의 낙천적인 특징이 처음으로 염려스러웠습니다. 제가 볼 땐 정말 운동장 개선이 필요한데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럽다고 답변하면 제가 설계한 기초공사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작 프로젝트 계획서의 명분을 위한 만족도 조사에 불과했는데 Bias를 잔뜩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설문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설문을 완벽히 세팅하고 난 후가 더 걱정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설문조사는 사실 일도 아닙니다. 그냥 구글 설문지로 설문지를 만들고 그 링크를 메신저를 통해 전달하면 끝입니다. 조금만 애를 쓰면 200명 정도의 응답은 몇 시간 만에 받을 수 있죠. 하지만 이곳은 우간다입니다. 먼저 학생들은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전화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학교 내에 있는 전화기를 이용합니다. 스마트폰이 없는 상황에서 구글 설문지보단 그냥 서면으로 진행하는 설문조사가 더 나을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저는 굳이 구글 설문지를 이용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설문조사를 위해 프린트를 하는 데 드는 비용과 수작업으로 일일이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그 작업이 더 막막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몇 백 장이 넘는 프린트를 부탁하기가 참 미안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수업을 진행하는 학급에 들어가 제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학생들에게 주고 설문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모바일 기기에 친숙하지 않을 것이란 걸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친숙하지 못해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태블릿으로 설문을 진행한 학생이 불과 5초 만에 설문을 끝냈다고 제게 다시 건네주길래 확인해봤더니 한 문항에만 체크를 해놓았습니다. 태블릿을 스크롤할 줄 몰랐던 거죠. 제 설문을 이해시키는 작업보다도 간단한 모바일 기기 사용법을 세세하게 알려줘야 했습니다. 설문이 끝나면 뒷자리 친구에게 기기를 넘겨줘야 하는데 제 앨범에 들어가 사진을 구경하는 친구들을 혼내는 일도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이패드를 처음 만져 본 사람들의 반응.jpg

한 반에 60명의 학생이 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스마트폰 하나와 태블릿 하나. 수업시간에 두 명이 설문조사를 하는 동안 58명은 멀뚱멀뚱 내버려둘 순 없었습니다. 팔자에도 없는 한국어 수업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다행히 학생들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 모두 큰 호기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우간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2개 국어를 하고 3개 국어 혹은 4개 국어를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영어를 제외한 로컬 언어 두세 개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컬 언어는 차이의 폭이 매우 적고, 이들은 영어 알파벳을 차용해서 써왔습니다. 그러니 전혀 다른 한글이 매우 신기할 법도 합니다.

PMM Girls' School 한국어 일타 강사로 소문이 나면서 이번 학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80분의 수업(이자 설문조사)을 수차례 진행하고, 표본이 부족해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학생들을 붙잡고 설문조사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주에 걸쳐 227명의 응답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전교생 577명의 절반에는 못 미치는 수치지만 그래도 대표성을 지니는 수치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문항이 있었지만 가장 마지막 문항인 학교 운동장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 질문(How much are you satisfied with the overall sports field condition?)에서 리커트 척도 1~5 범위로 평균 2.66점이라는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조금 애매하지만 이 수치가 얼마나 제 마음을 안심시켜주던지 잠시 마음이 놓였습니다.


뭔가 하나가 끝났으니 이제 좀 한 치 앞을 내다봤는데, 갑자기 또 앞이 막막해졌습니다. 시공업체를 만나 제가 원하는 운동장 디자인을 전달하고 견적서를 받아야 하는 엄청난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공업체를 어떻게 만나는지, 이 지역에 그런 업체가 존재는 하는지, 혹시 터무니없게 예산이 안 맞아 모든 걸 엎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나도 모르는 질문만 쌓여 가는 나날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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