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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Dec 25. 2019

돈 달라는 사람과 주기 싫은 사람의 숨 막히는 눈치게임

가난은 원인이자 결과다

"똑똑똑"


또 시작이다. 며칠 전부터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 보나 마나 Ernest일 것이다. 나는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차 있었다. 이 친구는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주인의 이복동생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는데, 자기가 학비가 없다며 꾸준하게 학비 지원을 요구하는 뚝심 있는 친구다.


봉사단원으로 우간다에 왔는데 당연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다. Ernest는 이 집에 사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이 친구에 대해 쓴 적이 있지만,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 돈을 요구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불편하다(https://brunch.co.kr/@nerdkim/34 참조). 그 역시 젠틀하게 말하려고 시도는 하지만 나 같은 널드에게는 그러한 접근 역시 부담이다. 하긴, 돈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어찌 젠틀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 친구가 마당을 쓸고 있으면 괜히 핸드폰을 보면서 들어간다거나,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앉아 있으면 빠르게 걸어 불편한 상황을 외면하려고 했다.


처음 내게 학비 지원을 부탁했을 땐 지금의 눈치게임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땐 진지한 대화 끝에 '네가 열심히 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학비 지원을 고려해보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어느덧 세 학기가 모두 끝나가는 시점이 되었다(우간다는 1년에 3학기제). 최소한 한 학기 학비의 절반 가량은 납부해야 시험 응시가 가능하고 나머지 학비를 완납해야 성적표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에서 시험기간은 시험공부만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시험공부 이전에 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한 학기 학비는 대략 25만 실링(한화 약 8만 원). 40,000원이 없어서 기말고사를 칠 수 없는 학생들이 학교에 절반 이상이다. 점수 나올 때까지 토익을 그렇게 응시하는 우리와는 또 다른 차원의 걱정이다.


Ernest는 그런 단서를 들은 이후로 꾸준히 나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하는 듯 보였다. 집주인과 함께 쓰는 공용공간 응접실에서 책을 쌓아놓고 공부를 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퍽 귀엽기도 했다. 그 응접실은 결코 공부하기에 적합한 공간이 될 수 없었다. 집주인의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이 모두 6살이 채 되지 않았고 그곳은 그들의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Ernest는 나름 공부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에 받은 성적표를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집주인 내외 분들과 막내아들 패트릭(2019.12.03)

성적은 Division 3였다. 옛날 성적표로 치자면 '미(美)'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성적표를 받으니 더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좋은 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못했다고 질책할 수는 없는 그런 성적이었다. 그는 학비 지원에 대한 뚜렷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니 조급증이 났고 그새 기말고사가 시작해버렸다.


Ernest 입장에선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첫날은 학비의 절반을 내지 못해 결국 교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루가 지났지만 그다음 날까지는 응시가 가능하도록 배려해주는 너그러운 우간다에서는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하루 차이는 커닝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하필 나는 모처럼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며 음악을 틀어놓고 있는 중이었으니 타이밍 역시 Ernest 편은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학비를 지원해달라는 부탁이 결국 징징거림으로 느껴질 때, 끝내 문을 열어졎혔다.

이제는 떠나온 우간다 집 모습(2019.10)
너 나한테 돈 맡겨 놨어!?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 집으로 돌아오는데 대문 앞에서 Ernest는 친구와 가만히 앉아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또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서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Ernest 역시 고민 끝에 나름 문을 두드렸던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미 나는 이성을 잃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학비가 필요했고 공부가 하고 싶었다면 오늘 오후에 거기에 그냥 앉아서 멍 때리고 있을 게 아니라 뭐라도 일을 하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건 제가 갑자기 어지러워서 앉아 있었던 거예요..."


처음 이 말을 들었다면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겠지만, 실제로 아프리카 친구들은 어지럼증이나 열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하고 아픈 증상이 있을 때 리액션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변명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 더 이상 이 부분을 질책하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성적이 대단히 좋은 것도 아니라며 잔소리를 시작했고, 왜 학비가 필요하고, 뭐가 하고 싶은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시험을 응시할 수 있다면 끝나고 방학 동안 고향에 내려가 일을 할 거예요. 밭 갈고 땅 파는 작업하면 하루에 5,000실링(1600원)을 받을 수 있어요. 겨울방학은 기니까 돈을 충분히 모으면 이번 기말고사 성적표를 받고 학비를 낼 수 있을 거예요."

"잠깐만, 너 하루에 5,000실링 벌면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방학이 대략 50일이지? 50일 전부 일하는 건 불가능해."

"맞아요. 30일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면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나한테 100,000실링 지원해달라고 했지?"

"네"

"근데 150,000실링 벌고 다음 학기에 가면 학기 등록은커녕 시험성적만 받고 또 똑같은 상황인 거네?"


나는 집으로 들어가 한 학기 학비를 들고 다시 나왔다. 그러고는 Ernest에게 돈을 건넸다.


"네가 이 돈으로 뭘 하든 자유야. 나를 속이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든 뭐 다른 걸 사든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이 기회를 학업에 쓰지 않는다면 네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는 셈이야."


그는 연신 너무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표했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고작 7만 원 줬으면서 과하게 생색낸 건 아닌지 민망함이 몰려왔다.



우리는 때때로 사정이라는 것이 잘 사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은 대체로 무시된다. '저렇게 시간 개념이 없으니 가난하지', '저렇게 막무가내니 가난하지', '저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가난하지' 등 가난은 대체로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해석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난은 원인이자 결과다. 그들 역시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정을 제각기 지니고 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공부는 해야 하지만, 학비를 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임금은 턱없이 부족하니 끝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 책에서나 본 이야기. 그 이야기가 마주 보고 있는 친구의 입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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