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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Aug 25. 2019

나도 누군가에겐 '조국'이 아닐까

공정성이 주는 민망함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간판의 의미가 큰 사회일수록 '공정성'은 지상 최고로 존엄한 가치를 부여받는다. 특히 경쟁을 앞두고 있는 집단일수록 공정성에 대한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안 그래도 계층 사다리가 사라지는 마당에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들은 사회적 분노를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심지어 정유라의 입학 비리에 대해 일갈하며 '공정'이라는 가치를 누구보다 강조했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몇 년 새 검증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이자 그 역시 사회 구성원이 인지하는 '공정'이라는 가치와는 요원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당연히 분노해야 할 시점이다. 특히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적이다. 한 대학 학생들은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학교 슬로건을 이용해 후보자 사퇴를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공정성이란 가치가 누군가에겐 예외적이라면 그 순간 그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단 한 명의 예외로도 사회 전체의 공정성은 균열이 일어난다. 그만큼 공정성은 지켜지기 어렵다.

출처: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분노라는 감정에 집중했겠지만 내가 딛고 있는 우간다라는 땅에서 쏟아지는 뉴스를 관망하고 있자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성찰'이다. 나는 지금의 나는 혹시 사회가 인지하는 공정성의 잣대에 부합하는 사람일까.


공정성을 논하기 전에 공정이라는 가치를 느끼는 우리의 인식 체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정성'은 필연적으로 복수의 대상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대두된다. 혼자 사는 세상에서 공정성은 의미도 가치도 없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공정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히 동일한 조건에서 모두를 출발시키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모든 구성원의 출발점은 제각기 다르다. 그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자칫 가망이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이러한 노력이 사회를 그래도 조금 더 살만한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는 데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얼핏 공정함이라는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공정성만큼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가치도 찾기 어렵다.


공정성이란 가치는 지키거나 못 지키거나 하는 이분법적인 가치가 아니다. 이게 공정한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헷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엄중하지만 매우 불명확한 잣대에 내 대입(대학 입시) 과정을 대입시켜보면 대략 이렇다.


나는 공정한 과정을 거쳐서 대학교에 입학했나? 표면상으로는 그런 것 같다. 첫 수능에 실패하고, 재수만에 정시로 원하는 학교이자 지금 졸업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내신은 안 좋았지만 수능은 비교적 자신이 있어서 전략적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선택을 감행했다. 이러한 전략과 내 노오력이 맞아떨어지긴 했다. 얼핏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기 딱 좋은 서사인 듯 보인다. 하지만 공정이라는 가치에 엄격한 우리 사회는 이런 단순한 과정만 보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내신이 좋지 않던 나의 고등학교 자퇴 결정을 이해해주고 고3의 나이에 재수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준 것은 공정했을까? 첫 수능의 고배 이후 내가 재수를 결심했을 때 부모님께서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주실 수 있었던 것은 그럴 수 없었던 이들과 비교했을 때 공정했을까?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버지가 다니시는 회사에서 등록금을 지원해주는 덕에 빚 없이 대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건 공정했을까?

출처: pinterest


이 모든 판단은 비교라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의 시선은 주로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성공한 이들에게 꽂혀 있기 마련이다. 상대적 박탈감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분노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특히 이러한 분노는 그것보다는 조금 못한 환경에서 어느 정도 기득권층에 속한 이들에게 더 강렬하게 표출된다. 하지만 비교는 내 위 하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보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나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 그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사회 구성원 모두는 어찌 보면 상대적 박탈감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인 기괴한 구조에 놓이게 된다. 이 구조에서는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덜 고생하면서 성과를 낸(그러니 내 기준으로는 불공정한 환경에 있는) 누군가를 보면서 느낀 상대적 박탈감을, 그 반대급부에 놓인 사람을 보며 얻는 상대적 우월감으로 위로받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에겐 공정함을 외치지만 누군가에겐 그다지 공정하지 못한 누군가가 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금씩 시선을 돌리면 나는 그야말로 공정성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할 수 없는 나쁜 놈이 된다. 나만큼 혹은 내 이상의 역량을 가진 이들이 앞서 말한 저런 상황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분명 성과를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힘들다. 같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더라도 더 많은 짐을 짊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도 엄밀히 보면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아직 내가 가장 불우한 개천에서 태어났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서사를 주장하고 싶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풍경을 묘사해주고 싶다. 물론 우간다라는 나라는 처음 예상보다는 어느 정도 살만 한 곳이다. 모든 집이 다 움막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수도 캄팔라에는 크고 좋은 시설의 건물들이 수두룩하다. 내가 사는 진자도, 이동하면서 통화를 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삶은 고통이다. 자기 몸은 누일 공간이 없어 밤이면 자신의 오토바이에서 엎드려 잠을 청하는 보다 기사들, 옷이 없어 천으로 몸의 일부분만 덮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이들, 소아마비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끝내 움직임에 큰 제약이 생기는 이들. 이곳에선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의 고민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매우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우간다 나일강 어촌에 살고 있는 아이들(2019. 8)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그러니까 어려운 환경에 처한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이겨내는 스토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력적이다. 그런 탓에 대부분 기득권층 안착에 성공한 사람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스토리로 재탄생시킨다. 실제로 내 주변의 교육 기득권층은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 이야기에 끼워 맞추는 경우가 많다. 정말 엄격한 공정성의 잣대로 누군가의 스토리를 가만히 들어본다면 그 누구도 결코 감히 나만의 실력으로 그 자리에 왔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확신하건대 내가 지닌 능력과 역량에 비해 주변 환경이 탁월했다. 나보다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이들이 환경에 의해 좌절되거나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민망할 따름이다. 우간다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민망한 곳이다.


그러니 조국 후보자를 보며 분노하는 것을 멈추지 말되, 다만 내면에는 민망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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