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가 달라지자, 세상이 달라졌다.
ADHD 약을 먹고 가장 먼저 좋아진 건 바로 운전이었다.
나는 아직도 약을 먹고 처음 운전했던 그 날의 느낌을 기억한다. 다른 변화들은 천천히 스며들었지만, 운전만큼은 세상이 한순간에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평생 뿌연 세상이 당연한줄 알다 안경을 쓰고 또렷한 세상을 처음 보게된 사람처럼, 나도 그랬다.
약을 먹고 첫 운전대를 잡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 집 앞길이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마치 내 몸이 풍경 속에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한층 집중되며 길이 넓게 펼쳐졌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그동안 세상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살아왔다는 걸. 항상 느끼던 붕 뜬 듯한 가벼움 대신, 몸이 바닥에 ‘착’ 붙는 느낌이 어색했지만, 모든 게 또렷했다.
평생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제야 왜 늘 운전이 그렇게 긴장되고 두려웠는지, 왜 남편이 “차 두 대는 지나가겠다니까!” 하며 답답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너비감’을 느낀 날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예전부터 그런 공간감이 없었다.
길도 잘 못 찾았고, 공간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24평과 34평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고, 대형차와 중형차를 비교할 때도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지 않으면 차이를 몰랐다. 색상과 모양이 비슷하면 종종 다른 차를 우리 차로 착각할 정도였다. 내게 ‘눈대중’은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늘 구체적인 수치나 실제 물건으로 비교해야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것이 ADHD와 관련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진단 과정에서 받은 풀배터리 검사 결과에서 나온 '주의의 초점이 넓다' 라는 표현이 그저 산만하다는 뜻이라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정말 넓게 볼 줄이야!
시야가 좁고 세밀해지자 길은 넓고 또렷해졌고, 난생 처음으로 운전이 쉬워졌다.
평소에는 내가 운전하지 않을 때조차 옆 차선이나 반대 차선의 대형차나 길가의 행인을 보고도 자주 놀래서 운전대를 잡은 남편까지 깜짝 놀라게 했었는데, 그 날은 큰 차들이 지나가고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도 동요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는 자극에 이끌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대로 주의를 돌릴 수 있는 것 또한 신세계였다.
평소라면 덜덜 떨면서 운전에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면, 그 날은 운전과 함께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도 운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시선을 내가 의도한 대로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었고, 처음으로 ‘운전이 재밌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시도조차 못 했던 핸드폰으로 노래 틀기도 해봤고 심지어 흥얼거리며 따라부르기도 했다. 항상 앞만 보며 가기도 버거웠는데, 옆 차선이나 백밀러를 수시로 보았다가도 다시 내 차선으로 시선이 돌아와지는 그 경험이 새로웠다. 갓길의 각종 현수막들과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가도 금새 주의를 도로로 전환할 수 있는 그 감각이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그동안의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게 느껴져 엉엉 울고 말았다.
나는 15년 간 초보 운전자였다.
필기와 장내 시험은 한 번에 붙었음에도, 장외 시험에서 무려 7번이나 떨어진 운전 미숙자였다.
아무리 운전을 해도 늘지 않았고, 결국 퇴근길에 대형 트럭을 들이받고는 두려움에 몇년 간 운전을 할 수가 없게되어, 차로 1시간이면 갈 직장을 전철로 2시간 넘게 타고 다녔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오고나서는 어쩔 수 없이 운전을 다시 시작했으나 동네 외에는 갈 엄두를 내질 못했다. 특히 번잡한 시내라도 나갈라치면 운전이 너무 무섭고 싫어서, 멀어도 가능하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니기 일쑤였다. 집에 들어오는 길이 익숙해지기까지도 몇 년이 걸렸고, 치료 전까지는 여전히 그 길이 너무 좁고 무서워 기어가듯 운전했다.
일차선 도로가 많은 시골 도로에서 느리게 가는 바람에 다른 차들의 눈총을 받으며 추월 당했고, 좁은 길 중간에서 맞은 편 차라도 만나면 매번 쩔쩔매며 운전을 못하는걸 어필할 수 밖에 없었다. 집중하려 노력 해도 순간 신호를 놓치거나, 뒤차를 못보고 돌거나, 끼어들기를 못해 난처한 상황이 잦았다. 어쩌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나에게 야간운전을 맡기면, 그 순간만큼은 생존이 걸린 전투 같았다.
세상에서 운전하는게 제일 싫어라고 당당히 말할 정도로 운전이 어려운 나였는데 이 약이 뭐라고 한순간에 운전이 쉬워졌다.
물론 약을 먹고 운전을 잘하게 된 거라기보다, 정확히는 약 덕분에 '운전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배우고 쌓아왔던 경험들이 이제야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나는 그렇게 약을 먹고나서야 초보 딱지를 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내 차의 기능을 익힐 여유가 생겼고, 운전 예절과 상식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장거리 운전은 시도하지 못했지만, 조금씩 나가는 거리를 늘려가며 자신감을 쌓는 중이다. 이젠 남편도 운전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시내 운전도, 주차도, 끼어들기도 곧잘 하고 이전에 비해 안전하게 운전한다. 얼마 전엔 운전 중 답답한 상황에 대해 지인에게 토로했더니 "요즘 운전이 많이 늘었네." 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는 차에 타면 자연스럽게 노래나 유튜브를 켜고, 아이와 대화를 나누며 집으로 향한다. 운전은 더 이상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나는 이제 '보통의 흐름'을 탈 수 있다.
예전엔 어쩔 수 없이 운전했다면, 이제는 자유를 위해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