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15년 만에 초보운전에서 벗어난 이유

시야가 달라지자, 세상이 달라졌다.

by 해자

ADHD 약을 먹고 가장 먼저 아진 건 바로 운전이었다.

나는 아직도 약을 먹고 처음 운전했던 그 날의 느낌을 기억한다. 다른 변화들은 천천히 스며들었지만, 운전만큼은 세상이 한순간에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평생 뿌연 세상이 당연한줄 알다 안경을 쓰고 또렷한 세상을 처음 보게된 사람처럼, 나도 그랬다.


약을 먹고 운전대를 잡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 집 앞길이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마치 내 몸이 풍경 속에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한층 집중되며 길이 넓게 펼쳐졌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그동안 세상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살아왔다는 걸. 항상 느끼던 붕 뜬 듯한 가벼움 대신, 몸이 바닥에 ‘착’ 붙는 느낌이 어색했지만, 모든 게 또렷했다.

평생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제야 왜 늘 운전이 그렇게 긴장되고 두려웠는지, 왜 남편이 “차 두 대는 지나가겠다니까!” 하며 답답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너비감’을 느낀 날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예전부터 그런 공간감이 없었다.

길도 잘 못 찾았고, 공간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24평과 34평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고, 대형차와 중형차를 비교할 때도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지 않으면 차이를 몰랐다. 색상과 모양이 비슷하면 종종 다른 차를 우리 차로 착각할 정도였다. 내게 ‘눈대중’은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늘 구체적인 수치나 실제 물건으로 비교해야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것이 ADHD와 관련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진단 과정에서 받은 풀배터리 검사 결과에서 나온 '주의의 초점이 넓다' 라는 표현이 그저 산만하다는 뜻이라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정말 넓게 볼 줄이야!


시야가 좁고 세밀해자 길은 넓고 또렷해졌고, 난생 처음으로 운전이 쉬워졌다.

소에는 내가 운전하지 않을 때조차 옆 차선이나 반대 차선의 대형차나 길가의 행인을 보고도 자주 놀래서 운전대를 잡은 남편까지 깜짝 놀라게 했었는데, 그 날은 큰 차들이 지나가고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도 동요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는 자극에 이끌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대로 주의를 돌릴 수 있는 것 또한 신세계였다.

평소라면 덜덜 떨면서 운전에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면, 그 날은 운전과 함께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도 운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시선을 내가 의도한 대로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었고, 처음으로 ‘운전이 재밌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시도조차 못 했던 핸드폰으로 노래 틀기도 해봤고 심지어 흥얼거리며 따라부르기도 했다. 항상 앞만 보며 가기도 버거웠는데, 옆 차선이나 백밀러를 수시로 보았다가도 다시 내 차선으로 시선이 돌아와지는 그 경험이 새로웠다. 갓길의 각종 현수막들과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가도 금새 주의를 도로로 전환할 수 있는 그 감각이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그동안의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게 느껴져 엉엉 울말았다.




나는 15년 간 초보 운전자였다.

필기와 장내 시험은 한 번에 붙었음에도, 장외 시험에서 무려 7번이나 떨어진 운전 미숙자였다.

아무리 운전을 해도 늘지 않았고, 결국 퇴근길에 대형 트럭을 들이받고는 두려움에 몇년 간 운전을 할 수가 없게되어, 차로 1시간이면 갈 직장을 전철로 2시간 넘게 타고 다녔다.

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오고나서는 어쩔 수 없이 운전을 다시 시작했으나 동네 외에는 갈 엄두를 내질 못했다. 특히 번잡한 시내라도 나갈라치면 운전이 너무 무섭고 싫어서, 멀어도 가능하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니기 일쑤였다. 집에 들어오는 길이 익숙해지기까지도 몇 년이 걸렸고, 치료 전까지는 여전히 그 길이 너무 좁고 무서워 기어가듯 운전했다.

일차선 도로가 많은 시골 도로에서 느리게 가는 바람에 다른 차들의 눈총을 받으며 추월 당했고, 좁은 길 중간에서 맞은 편 차라도 만나면 매번 쩔쩔매며 운전을 못하는걸 어필할 수 밖에 없었다. 집중하려 노력 해도 순간 신호를 놓치거나, 뒤차를 못보고 돌거나, 끼어들기를 못해 난처한 상황이 잦았다. 어쩌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나에게 야간운전을 맡기면, 그 순간만큼은 생존이 걸린 전투 같았다.

세상에서 운전하는게 제일 싫어라고 당당히 말할 정도로 운전이 어려운 나였는데 이 약이 뭐라고 한순간에 운전이 쉬워졌다.

물론 약을 먹고 운전을 잘하게 된 거라기보다, 정확히는 약 덕분에 '운전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배우고 쌓아왔던 경험들이 이제야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나는 그렇게 약을 먹고나서야 초보 딱지를 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내 차의 기능을 익힐 여유가 생겼고, 운전 예절과 상식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장거리 운전은 시도하지 못했지만, 조금씩 나가는 거리 늘려가며 자신감을 쌓는 중이다. 이젠 남편도 운전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시내 운전도, 주차도, 끼어들기도 곧잘 하고 이전에 비해 안전하게 운전한다. 얼마 전엔 운전 중 답답한 상황에 대해 지인에게 토로했더니 "요즘 운전이 많이 늘었네." 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는 차에 타면 자연스럽게 노래나 유튜브를 켜고, 아이와 대화를 나누며 집으로 향한다. 운전은 더 이상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나는 이제 '보통의 흐름'을 탈 수 있다.

예전엔 어쩔 수 없이 운전했다면, 이제는 자유를 위해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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