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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Jun 30. 2020

#1 이_아이를_부탁한다 ⓵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⓵

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⓵

“무릇 공부의 시작은 남의 글을 읽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 과정은 스스로 묻고 생각하고 직접 정리해 글로 써보는 것이리라. 그 끝은 모르겠다.” _ 내맘대로 역사 공부를 시작하며



#1 이_아이를_부탁한다 ⓵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수일욕사(回首日欲斜)

황천무일점(黃天無一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형장의 북소리는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네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뉘 집에서 묵어 갈까나


세간에 성삼문의 절명시로 알려진 시다. 

내가 아는 한, 죽음을 대하는 가장 의연한 자세이다. 장자의 가르침 중에 ‘오생야유애(吾生也有涯)’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삶은 (누구나) 그 끝이 있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온다. 다만 언제, 어떻게 그것과 대면하는가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어쩌면 그중에 가장 힘든 대면이, 번연히 죽을 줄 알면서도 제 발로 그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550여 년 전에 한 치의 망설임이나 흔들림 없이 그 속으로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다음 세대를 살았던 남효온은 그들을 「육신전」이라는 글로 기록했고, 후대의 우리들은 ‘사육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죽음들 맨 앞에 성삼문이 있었다. 


기실 앞선 장자의 가르침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맞춰져 있었다. 

가르침은 ‘(그렇지만) 앎에는 그 끝이 없다(而知也无涯)’로 이어지고, ‘끝이 있는 삶을 살면서 끝이 없는 앎을 추구하는 건 위태로운 일이므로 그 자잘한 지식에 얽매이지 말고 거대한 도(道)를 깨달아야 한다’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의 유한한 삶과 언젠가 받아들여야 할 죽음을 대하는 격언으로 삼기에 부족함은 없다. 어쩌면 죽음과 삶과 도는 마치 무쇠 솥을 지탱하는 세 개의 다리처럼 함께 인간의 존재 이유를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성삼문은 유한한 삶 속에서, 끝없는 앎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그 거대한 도를 깨달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성삼문은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실패하여 처형당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1456년 6월, 조선의 하늘은 파랗게 맑기만 한데 그 땅과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달은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지 꼭 1년째 되는 달이었다. 1455년 윤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노골적으로 왕위를 탐하는 무소불위의 숙부를 둔 힘없고 어린 임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날의 일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조실록」의 첫 번째 기사였다. 당시 상황에선 엄연히 단종이 임금이었고 세조는 대군 중 한 명이었으나, 세조 사후에 작성된 실록이다 보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록했다.   

  

(노산군이) 또 명하여 재촉하니 동부승지 성삼문이 상서사(尙瑞司)로 나아가서 대보를 내다가 전균으로 하여금 경회루 아래로 받들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 노산군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서 세조를 부르니, 세조가 달려 들어가고 승지와 사관이 그 뒤를 따랐다. 노산군이 일어나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를 잡아 세조에게 전해 주니, 세조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노산군이 명하여 부축해 나가게 하였다.


그달은 윤달이었다. 

‘공달’ 혹은 ‘덤달’이라고 부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짜로 보태진 달이다. 그래서 흔히 걸릴 것도 없고 탈도 없는 달이라고 해서 결혼이나 이사, 이장 등 집안의 중대사를 윤달에 처리하곤 했다. 어쩌면 단종은 이러한 윤달의 풍속, 그 ‘뒤탈 없음’을 믿었던 것은 아닐까. 이미 이태 전(1453)에 자신의 수족을 역적으로 몰아 모두 죽이고 임금보다 막강한 영의정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칼끝을 자신에게 겨누며 옥죄어오던 숙부였다. 칼날이 아니더라도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르는 고통의 나날 속에서 어린 임금이 의지할 데는 없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었고 그토록 총명하시던 아버지마저 왕위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인 세종이 자신을 안은 채 “이 아이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던 집현전 학사들은 아직 자신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더구나 그중 일부는 이미 수양대군 편에 붙어버렸다. 그러니 어쩌랴.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고 하니, 이때 왕위를 넘겨주면 자신에게 아무런 뒤탈이 없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어린 단종에게는 선택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예방승지로서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선위의 자리에 대보(大寶, 왕이 국정을 다스릴 때 사용하는 모든 도장을 옥새라 부르는데, 대보는 그중 가장 중요한 도장이다. 주로 왕위를 물려줄 때 상징적으로 전해주는 게 바로 이 대보이다. 중국에 문서를 보낼 때도 이 대보를 찍었다)를 들고 가던 성삼문은 대보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또 다른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은 선위식이 거행된 경회루 못에 빠져죽으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말렸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성삼문과 박팽년을 중심으로 한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권자신, 윤영손 등 단종의 처가 사람들과도 긴밀히 의논하였다. 그러면서 세조의 일정을 면밀히 체크했다. 당시 성삼문은 좌부승지로서 세조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알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성삼문 사당인 충문사, 충남 홍성 노은리


마침내 기회가 왔다. 

1456년 6월 1일, 세조가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국왕이 바뀌면 명나라의 황제에게 책봉을 청하는 주문사를 파견했다. 이때는 신숙주가 주문사가 되어 북경으로 갔다. 그 결과 명은 세조의 책봉을 승인하는 사신을 조선에 보냈고, 연회는 명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환송하는 자리였다. 단종 복위 세력들은 이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더구나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뿐 아니라 함께 복위를 도모했던 유응부와 박쟁이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이 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늘이 돕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들은 “연회가 시작된 후 곧바로 거사를 일으켜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한명회, 권람, 정인지 등)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일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들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한명회가 세조에게 별운검을 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자신의 ‘장량(한고조 유방의 책사)’이라며 신임하는 한명회의 말을 흘러들을 세조가 아니었다. 세조는 자리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별운검을 폐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삼문은 별운검을 없앨 수 없다고 간하였으나, 세조는 신숙주에게 연회장 상황을 한번 살펴보게 한 다음 결국 별운검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생각해보면 한명회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는 김종서 등을 제거한 계유정난(1453)이 일어난 지 삼 년도 채 안 된 데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지 불과 일 년밖에 안 된 때였다. 때론 성공하기도 하고 때론 실패하기도 했지만,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늘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한명회였다. 그러니 눈에 불을 켜고 레이더를 가동시키고 있던 한명회에게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이 포착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더구나 당시에 유배 중이던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과 집현전 학사 출신 및 그 주변 인물들은 요주의 사찰 대상이었다. 특히 성삼문은 옥새를 전해 주며 대성통곡을 했을 뿐 아니라, 그전에도 이미 전과가 있었다. 계유정난 후 책봉된 공신 명단에 성삼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사 당일에 집현전에서 숙직한 공이 있다는 이유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자신의 거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최고의 두뇌 집단이자 유학자인 집현전 학사들이 필요했다. 단지 들러리용이라기보다는 당대 젊은 인재들의 지지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삼문은 세조의 그런 맘도 몰라주고 “자신은 공이 없다”며 공신록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공신록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축하연을 열었다. 하지만 성삼문만은 끝까지 잔치를 하지 않았다.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 또한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강탈하자, 집으로 달려가 통곡한 후 벼슬을 내놓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세조가 벼슬을 내려도 병을 핑계로 마다하였다. 그러던 사람이 세조가 여는 연회의 별운검을 아무 망설임도 없이 맡으니 한명회의 눈에 자연스럽게 비칠 리가 없었다.     


유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별운검과 상관없이 계획한 거사를 실행하자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뒷날을 도모하자며 이들을 말렸다. 그러나 뒷날은 오지 않았다. 완벽한 기회를 엿보던 그들의 결정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되고 말았다. 사실 우리 삶에서 ‘완벽함’이란 결과론적일 때가 많다. 어떤 상황이든 계획한 거사를 성공시키면, 그 거사는 ‘완벽한’ 상황을 선택한 ‘완벽하게’ 계획된 것으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일의 ‘결과’라는 것은 인간이 미리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위는 ‘완벽한 선택’이 아니라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결국 단종 복위 세력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봐왔듯이, 한번 세상에 발설되었다가 어긋난 음모는 미래를 기약하며 다시 주워 담아 추스를 수 없다. 비밀이란 놈은 인내심도 그리 강하지 않을뿐더러 그 유효기간 또한 그리 길지 않다. 희망에 찬 거사가 칼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면, 그 무리 속 누군가의 불안감은 증폭되기 마련이었다. 이번엔 김질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거사 실패 후 불안해진 그는 그날로 장인이자 의정부 우찬성인 정창손에게 쪼르르 달려가 거사 계획을 밀고하였다. 정창손은 그길로 사위의 손을 잡고 궁궐로 향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6월 2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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