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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Aug 05. 2020

#6 이_몸이_죽어서_무엇이_될꼬_하니 ⓶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⓺

#6 이_몸이_죽어서_무엇이_될꼬_하니 ⓶



국문은 세조가 직접 했다. 

흔히 세상에 알려진 세조와 성삼문의 대화를 들어보자. 


“어찌하여 과인을 배반하였느냐?”

“어린 상왕이 나으리께 왕위를 빼앗겼으니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소?”

“너는 왕을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느니라. 그것이 배반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께서 어찌 나를 신하라 할 수 있겠소”


당시의 상황을 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세조가 친국하여 꾸짖어 묻기를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했느냐?”라 하니, 삼문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이오. 천하에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소. 나의 마음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어찌 배반이라 하는 것이오. 나으리는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인용했는데 주공 역시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 일을 한 것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듯이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오”라 했다. (중략) 세조가 말하기를 “네가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도 배반했으니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로다” 하니, 삼문이 말하기를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겠소? 또 나는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믿지 못하겠으면 내 집을 뒤져서 계산해 보시오”라고 했다. (중략) 죽고 나서 그 집을 적몰해 보니 을해년(세조 즉위년) 이후의 녹봉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어느 달의 녹봉’이라 써 놓았다.     


이 하나의 기록만 봐도 당시 국문장 분위기를 비롯하여 단종 복위 운동을 했던 사육신의 마음과 의지, 세종부터 단종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을 아껴주던 주군에 대한 불사이군의 충의, 불의에 눈 감지 않는 절의 등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성삼문뿐만 아니라 사육신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기록에 따르면 국문장에서 세조를 “나으리”라 칭하고, 세조가 주는 녹을 쓰지 않고 한곳에 모아둔 건 박팽년이나 하위지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더라도 세조는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죄를 뉘우치면 살려줄 생각도 있었던 듯했다. 

6월 3일경, 세조는 신숙주를 박팽년에게 보내 “자신을 섬기면 죄를 사면해주겠다”고 했다. 박팽년은 그저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위지 또한 세조가 비밀리에 “네가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고 스스로 변명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며 회유했다. 그러자 하위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남들이 반역으로 지목한 이상 그 죄는 응당 죽어야 하오. 무엇하러 물어보는 거요?”라고 말했다. 성삼문을 회유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았다. 세조가 왕위를 오르는 날 옥새를 가져오면서 대성통곡하는 걸 세조가 보았다고도 하고, 국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더 꼬장꼬장하게 세조를 쏘아붙였을 성삼문에 대해서는 세조도 이미 맘을 접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성삼문은 온몸을 불로 지지는 모진 고문을 받을 때조차 세조 옆에 서 있던 신숙주를 보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네 이놈. 예전에 영릉(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고 산책하시면서 곁에 있던 우리에게 상왕의 후일을 당부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네 놈만 그 일을 잊었단 말이냐?”     


결국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다섯 명의 아들과 세 명의 아우 등 집안의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는 멸문지화를 겪었다. 가산은 몰수되고, 처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성삼문은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좌우에 있던 옛 동료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이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린 딸 효옥이 수레를 따라오면서 울자,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며 달래고는, 집안의 종이 울면서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 마신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서두에 소개한 시가 작자에 대한 논란이 있는 반면, 이 시는 성삼문이 지은 또 다른 절명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죽음을 앞두고도 꺾이지 않는 절의가 듣는 이의 마음을 절로 숙연하게 했다. 

이 시는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의 성삼문 각비에도 적혀 있다. 봉래산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여름의 금강산을 부르는 별칭으로 사용되기도 하나, 원래는 방장산, 영주산과 함께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삼신산 중 하나다.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에 의하면, 중국의 동쪽 바다인 발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산으로, 그곳에는 신선이 살고 불사약과 불로초가 있다고 했다. 또한 새와 짐승이 모두 희고, 궁궐은 황금과 백은으로 지어졌다는 전설이 있었다. 성삼문은 38살의 젊은 나이에 그렇게 전설 속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낙락장송이 되어 하얀 새들과 놀며 현세에서 이루지 못한 불사의 꿈을 이루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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