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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Aug 27. 2020

#9 내가_왕이_될_상인가?(feat_계유정난) ⓵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⓽

#9 내가_왕이_될_상인가?(feat_계유정난) ⓵     


백이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왕조시대에 장남이 자신보다 똑똑한 형제를 위해 왕위를 포기한 일은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앞에서도 언급한 주 무왕의 선조인 태백이었다. 태백은 주나라 태왕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현명한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싶어 하자 둘째동생을 데리고 궁을 떠나 숨어버렸다. 결국 계력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고, 그 아들이 문왕이 되고, 또 다시 그 아들이 무왕이 되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했다. 결과적으로 태백의 포기가 있었기에 주나라 봉건 제국이 탄생한 셈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태종이 영민한 셋째아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자, 장남인 양녕대군은 미친 척하여 세자 자리를 포기했으며, 형의 의중을 들은 효령대군 또한 왕좌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물론 이것이 야사에서 전하는 이야기란 걸 감안하고, 그렇게 된 저간의 사정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장남인 양녕대군은 왕위를 포기했다. 그리고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된 지 약 두 달 만에 권좌에 올랐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세종대왕이 있게 되고, 우리가 우리말 한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역사에는 이처럼 장남의 포기 사례만 있는 건 아니었다.

숙부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지 않고, 오히려 조카를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한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 역시 앞서 말한 주나라의 왕자인 주공 단(旦)이었다. 주공은 주 문왕의 아들이었다. 즉 무왕의 동생이자, 성왕의 숙부였다. 무왕이 죽자 성왕은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자 주변에서는 주공에게 직접 왕권을 장악하라고 유혹했다. 하지만 이를 뿌리친 주공은 강보에 싸인 성왕을 안고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처리해 천하를 안정시켰다. 이러한 일화도 있었다. 어린 성왕이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주공은 스스로 손톱을 잘라 황하에 던지면서 기도했다. “왕께서 아직 어리기에 제가 왕을 대신하여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만약 허물이 있다면 제가 대신 그 재앙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어 기부(記府, 천자가 문서를 보관하던 곳)에 간직했다. 나중에 성왕이 자라서 친정(親政)을 하자, 간신 하나가 “주공 단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 지 오래입니다. 왕께서 만일 대비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큰일이 일어날 것입니다”고 했다. 그 말을 믿은 성왕은 몹시 화를 냈다. 결국 주공은 쫓겨서 초나라로 피신했다. 그러나 해피엔딩의 스토리는 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계기가 있게 마련이었다. 시간이 흘러 성왕이 앞서 주공이 기부에 보관했던 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누가 주공 단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했는가?” 성왕은 그 말을 한 자를 죽이고 주공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처럼 개인의 탐욕보다 충의를 실천한 주공을 가장 흠모한 사람은 유학의 비조인 공자였다. 

너무 흠모한 나머지 공자는 자주 주공 꿈을 꾸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때면 늘 “어젯밤 꿈에 주공을 만났는데, 주공이 말하길……”이란 말부터 꺼냈다. 또한 늘그막에는 “오랫동안 주공을 꿈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니 정말로 내가 허약해지고 늙은 것 같다”고 탄식했다. 


주공은 문왕, 무왕, 상왕 3대에 걸쳐 활약한 인물이었다. 

주공은 주역의 기초인 「효사」를 썼는데, 문왕의 「괘사(卦辭)」와 주공이 쓴 「효사(爻辭)」에 의해 완성된 ‘주나라의 역’이라는 의미로, 이 둘을 합쳐 주역(周易)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한자 ‘역(易)’은 상형문자로 ‘카멜레온’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자와 얼추 생김새도 비슷하고, 더구나 변화무쌍함의 대명사인 카멜레온이라면, 그 의미에 가장 어울리는 선택으로 보인다. 강태공뿐 아니라 이런 주공이 있었기에 주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호령할 수 있었다. 주공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노나라로 떠나는 아들에게 해준 말이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으로 제후 중에서도 고귀한 몸이지만, 어진 사람이 찾아오면 머리를 감다가도 그것을 쥔 채로 나가서 맞이하고, 밥을 먹다가도 그것을 뱉고 나가서 맞이한다. 그것은 유능한 현인에게 예를 다하기 위한 것이다. 너는 노나라에 가거든 현인의 소중함을 알고 예로써 선비들을 대해야지 결코 오만하게 굴면 안 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자기 고귀함만 알뿐 다른 사람의 자존감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천지인 인간사에서 주공의 이 말은 새겨들을 만하지 않을까.


그러나 수양대군은 주공의 사례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에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의 사례를 따랐다.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탁발승을 하다가 황제가 된 인물이었다. 즉 중국 역사상 가장 출신 계급이 낮은 황제였다. 그러다 보니 자격지심이었을까. 안정적인 후계 구도를 위해 수많은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보다 가문이 좋은 개국공신들이 태자의 권력을 넘볼 걸 우려해 무려 3만여 명의 관료와 그 가족들을 10년 전의 모반 사건에 억지로 연루시켜 처형하는가 하면, 1392년에 태자가 병으로 죽자 이번에는 손자에게 안정적으로 권력을 승계하기 위해 또다시 1만 5천여 명을 죽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아들들이었다. 그는 모두 24명의 아들을 두었다. 1398년에 주원장이 사망하자 손자가 2대 황제인 혜종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피의 숙청을 하면서까지 원했던 주원장의 바람은 자신의 아들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 혜종의 권좌는 오래가지 못했다. 주원장의 넷째아들인 연왕의 야심은 젊은 조카를 가만두지 않았다. 혜종이 황제에 오른 이듬해부터 명나라는 숙부와 조카 간의 내전에 휩싸였다. 그러나 연약한 조카는 권력욕을 가진 숙부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1402년 연왕은 조카를 몰아내고 명나라 3대 황제가 되었다. 그가 바로 영락제였다. 

이 이야기는 불과 50여 년 후 조선에서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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