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⓾
이 이야기는 불과 50여 년 후 조선에서 재현되었다.
그 시작은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난 이른바 계유정난이었다. 당시 조정의 권력은 김종서가 쥐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6진을 개척한 명장으로 기억되는 김종서는 사실 문관 출신이었다. 당시 고명대신이자 좌의정이었던 그는 의정부서사제를 통해 영의정 황보인 등과 함께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김종서를 세종에게 추천하고, 앞으로 크게 쓰일 인재임을 알아본 건 명재상 황희였다.
그러나 역사에 전하는 황희와 김종서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황희가 김종서를 혼내는 장면이었다. 황희는 김종서가 조금이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가차 없이 혼을 냈다. 사람 좋고 너그러운 재상으로 알려진 황희가 김종서를 대할 때만은 조금의 용서나 자비도 없이 추상같이 나무랐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로는 이런 일화가 있다. 조정 대신들이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서 병조판서였던 김종서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걸 본 황희가 아랫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병판이 앉아 계신 모습이 삐딱한 걸 보니 의자 다리가 삐뚤어진 모양이다. 그러니 얼른 고쳐 드려라.” 이 말을 들은 김종서는 깜짝 놀라 똑바로 앉았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을 것이다. 이렇듯 매사에 황희가 하도 김종서를 쥐 잡듯 하니, 맹사성이 보다 못해 황희에게 물었다. “김종서는 이름난 대신인데, 아니 왜 그리 매사에 잡도리를 하시는 게요?” 그러자 황희는 자신의 의자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종서는 이 자리를 이어받을 인물입니다. 성격이 거만하고 매사에 경솔하고 진중하지 못하면 큰일이지요. 그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지,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황희의 가르침은 큰 효과를 보진 못한 듯하다.
김종서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손에 쥔 권력 앞에서는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진 못했다. 단종 시절 명나라에서 온 사신은 김종서에 대해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는 품평을 남겼다. 세간에는 이런 말도 돌아다녔다. “황보인이 조상 묘에 제사 지내러 고향에 갈 때 전송하는 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으나, 김종서가 갈 때보다는 많지 않았다.” 김종서의 아들이 아버지 덕에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더더구나 사람들에게 “성상 위에 좌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고 하니, 그의 브레이크 없는 전횡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를 추천하고 가르친 황희도, 그를 고명대신으로 삼아 단종을 부탁한 문종도, 이렇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점을 찍은 게 바로 그 유명한 ‘황표정사(黃標政事)’였다.
황표정사란 이조나 병조에서 의정부 대신들과 상의해 세 명의 관직 후보자인 삼망(三望)을 임금에게 추천할 때, 그중 적격자 1인의 이름 밑에 황표(누런 쪽지)를 붙여서 올리면 임금이 형식적으로 낙점하던 일을 말한다. 즉 임금이 어리다는 이유로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김종서를 비롯한 의정부의 삼정승이 인사권을 좌지우지했던 셈이다. 이는 곧 모든 권력이 실질적으로 김종서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을 의미했다. 이로써 조선 건국 당시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결로 대표되는 신권 대 왕권 구도에서 신권이 권한을 쥐고 주도하는 형국이 되었다. 죽은 정도전의 꿈을 김종서가 이룬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할아버지인 이방원과 여러모로 가장 많이 닮았다고들 평하는 수양대군이었다.
마침내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