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⑬
조선의 왕들을 빅데이터로 분석하면 여러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세종과 정조처럼 학자적 자질을 가진 성군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도 있고,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반정에 의해 쫓겨난 그룹으로 묶을 수도 있다. 또한 중종, 선조, 숙종, 영조처럼 장기 집권한 왕들도 있다. 그중에 하나의 카테고리가 있다면, 재위 기간이 3년도 되지 않아 갑자기 죽은 왕들이다. 문종, 예종, 인종이 그들이다(정종도 재위 기간은 2년 2개월이지만 왕좌에 있을 때 죽은 건 아니다). 이들은 왕이 되어 뭔가 해보기도 전에 죽음으로써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왕으로서의 존재감이 거의 미미했다.
예종은 훈신 세력 사이에서 고군분투했지만 일 년이 지나자마자 형인 의경세자가 요절할 때와 똑같은 20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이유도 없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예종은 조선시대 독살설의 명부에도 이름이 올랐다. 독살설의 정황 증거로 흔히 거론되는 것은 예종이 죽자마자, 마치 미리 준비된 각본이 있는 것처럼, 사망 당일에 왕위 서열 3위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산군(성종)을 서둘러 등극시킨 일이었다. 왕위 서열 1위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고, 2위는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군이었다. 그러니 예종의 죽음부터 자산군의 등극까지 뭔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했다고 의심할 만했다. 인종은 비록 예종보다는 늦은 나이(31살)에 죽었으나, 재위 기간은 고작 9개월로 조선의 왕 중에 가장 짧았다. 그러니 무언가 후대에 기억될 만한 실적을 남기기엔 부족한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이들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어떤 업적이나 성과가 아니라, ‘효성이 지극한 아들’ 같은 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문종은 다르다. 왕좌에 오른 지 얼마 안 돼 병사하였고, 그 재위 기간도 2년 4개월밖에 안 되고, 효성 또한 지극한 아들이었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문종에 대한 평가가 폄하되어선 안 된다.
사실 임금으로서의 자질과 성군의 가능성으로만 보면 문종은 세종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역시나 지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조정의 일에 깊이 개입했었다. 이는 다른 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활동은 세종의 교육관이기도 했다. 세종은 왕세자뿐 아니라 왕이 되지 못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들이 평생 정치나 국가의 일로부터 멀어져 그림이나 그리고, 술과 여색에 빠지고, 머리 깎고 불가에 귀의하거나, 지방을 떠돌며 살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이 집현전 학사들과 어울리며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고 책도 만들게 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세종이 자신의 형들을 보면서 깨우친 것일 수도 있다. 그 속사정이야 어떻든 왕위를 이어받을 자리에서 쫓겨난 양녕과 효령에 대한 미안함을 세종을 늘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종은 비록 제한적인 권력이었지만 8년간의 대리청정을 통해 집권자로서의 통치 행위를 꽤 오랜 기간 수행했으며, 왕위를 계승해 친정을 한 후에도 우리 역사에 기억될 만한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과연 문종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그의 이름은 이향이다. 우선 그는 조선 최초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었다.
정종과 태종은 태조의 둘째아들과 다섯째아들이었고,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들이었다. 태종은 왕권에 대한 장자 상속의 꿈이 있었지만, 결국 자기 손으로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또한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세자의 자리에 있었다는 기록도 문종의 몫이었다. 8살에 왕세자가 되어 무려 29년 동안 왕세자의 위치에서 왕이 되길 기다려야 했다. 세종이 세자가 된 지 52일 만에 임금이 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문종은 또한 조선 최초로 대리청정을 한 왕세자였다.
세종은 집권 후반기 8년을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도록 했다. 이조의 인사권과 병조의 군사권, 그리고 국가의 중대사만 세종이 직접 챙기고 나머지는 왕세자에게 맡겼다. 대권 수업만 이미 20여 년을 받았으니 정무 능력을 보여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8년의 왕권 실무 경험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개입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측우기가 실질적으로는 문종의 발명품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했을 때 그는 완벽히 준비된 임금이었다. 세종 때 실시한 4군 6진의 북방 정비 작업을 완료하였고, 역사 편찬 작업의 일환으로 세종 때부터 추진해 온 『고려사』(1451)와 『고려사절요』(1452)를 완성하였다.
우리는 보통 세종의 아들 중에 수양대군만 무인의 이미지로 기억하지만 문종 또한 병법에 조예가 깊고 전쟁 무기 제작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밀덕(밀리터리 덕후)’인 셈이다. 화차 개발은 물론 직접 진법도 만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실록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나온다. 문종 대에 일어난 에피소드지만 기사는 「세조실록」에 실려 있었다. 문종이 재위할 때 수양대군에게 진법 제정을 명령했는데, 그 결과물이 흡족했던 모양이다. 문종은 수양대군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짐짓 이렇게 말했다.
“이정(李靖, 당나라 장수)은 수양보다 나을 것이 없고, 나는 아마도 제갈량과는 차이가 좀 날 것 같다.”
즉 수양대군의 자질을 높이 치켜세우면서, 자신 또한 좀 부족하지만 중국 역사상 최고의 책사이자 병법가인 제갈량에 빗대었던 셈이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이렇게 응수했다.
“제갈량은 장재(將才, 장수의 자질)가 부족한 사람인데, 성상께서 어찌 이에 비해 논하십니까?”
형인 문종이 병법에만 능한 게 아니라 장수로서의 자질도 훌륭하다는 의미였다.
사실 실록의 기록만 놓고 본다면 문종이 죽기 전까지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을 잘 따랐다. 기록에 의하면 문종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병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상당한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문무에 두루 재능이 있었다. 다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의 앞길을 막은 건 지병이었다. 병의 원인은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흔히 그렇듯 문종도 선천적인 DNA와 후천적인 환경이 모두 작용한 결과였다.
문종은 아버지 세종을 여러모로 많이 닮았다.
‘서사(書史)를 강론하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고, 하루 동안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말해주듯, 문종도 학문에 열중하거나 일에 빠지면 좀체 쉴 줄을 몰랐다. 더구나 효성도 지극하여 세종이 아플 때면 그 바쁜 대리청정 기간에도 세종의 약을 먼저 맛보고 수라상을 보살피는 일을 반드시 몸소 행하고, 밤중까지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으면 감히 물러가지 않았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세종은 당뇨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그러니 긴 병에도 효자인 품성을 가진 문종이라면 세종 병간호하다 먼저 초상 치를 지경이었을지도 모른다.
1446년에 어머니 소헌왕후의 죽음에 이어, 1450년 세종의 죽음까지 연이어 초상을 치러야 했던 문종은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등창을 앓다가 병마에 굴복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어린 단종은 불과 2년 만에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까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어쩌면 단종의 비극은 이 죽음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문종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여색에 빠지거나 수렵에 탐닉하거나 술과 음악을 즐기거나 화려한 집을 좋아하지 않았다. 천성이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고기는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종이 몸져눕거나, 초상을 치를 때에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문종의 이런 행실을 알고 있는 세종은 자신이 죽으면, “초상난 지 3일 만에 밥을 먹고, 한 달이 넘으면 술을 마시며, 졸곡 후에는 고기를 먹으라”고 미리 명령했다.
문종은 그렇게 3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