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풍경이 좋아
그때, 본래 계획은 남해의 섬들을 하나씩 정복하는 것이었다. 섬투어.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배 아저씨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너희 계획대로 섬도 가고 여행하려면 잠도 자면 안 되고, 밥도 먹지 말고 다녀야 한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계획은 수정되었다. 섬투어는 반나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바이크를 타고 달리기로 했다. 훨씬 전에 했던 동해나 서해 투어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달리는 것이었다. 이런 여행에는 차보다 바이크가 맞다. 차는 덩치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길도 제한된다. 편안한 드라이브라면 자동차가 좋겠지만, 마음껏 지르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면 자전거나 바이크가 정답이다.
출발은 통영이었다. 밤기차를 타고 도착해 그곳에 사는 친구와 합류했다. 첫날은 주머니가 두둑했으니 통영에서 회를 실컷 먹었다. 충무김밥과 멍게비빔밥. 싸고 맛있어서 배가 터질 정도였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마을 회관이나 어르신들 집에 잠깐씩 머물거나 민박을 하기도 했다. 마을회관은 단연코 좋은 숙소였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속 달콤한 상황은 아니지만, 현실을 보는 맛이 있었다. 할머니들이 건네는 옥수수와 감자는 가끔 있는 작은 행복일 뿐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쉽지 않고, 위험과 어려움이 많았다.
여행 대부분의 날을 비를 맞고 폐인이 되었다. 친구의 바이크가 고장 나 반나절을 수리하며 보내기도 했다. 배고픔과 피로 속에서, 은은하게 서린 다크서클은 뺨 위로 흘러 목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바다를 끼고 달리는 기분은 그 모든 피로를 잊게 했다. 길도 풍경도 마음을 설레게 했다. 국도를 따라가기보다 샛길이나 마을을 가로질러도 좋았다. 가방 속에는 돈, 비상약, 플래시, MP3, 카메라, 세면도구, 티셔츠 두 장, 바지 한 벌, 속옷이 전부였다. 달리다 경치가 끝내주는 곳에서는 내려서 빵을 먹고, 음악을 듣고, 잠깐 쉬었다 다시 떠났다. 계획은 없었다. 바다가 보이면 그저 좋았다. 밤이슬을 맞고, 잠을 못 자고 달리다가도, 반나절을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P들의 여행이었다고나 할까. 계획한 게 있었다면 의도적으로 시내나 번화가는 피했다.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기에, 굳이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찜질방도 고민했지만, 역시 패스.
그렇게 며칠 만에 여수에 도착하며 여행은 끝을 맺었다.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런 여행도 끝이겠지 했다. 실제로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떠도는 여행은 그 여행이 마지막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풍경을 보고, 자연을 느끼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비와 바람을 맞고, 땀에 젖고, 배고픔을 겪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졸음을 이겨내며 잠들었다. 수십 번 절망하고, 수십 번 결심하며, 수많은 생각을 한 여행이었다. 깨닫기 위해 떠난 여행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내가 그러했듯 많은 걸 깨닫고 마주하고 온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