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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Jul 25. 2024

내게 강 같은 평화 (2)

카누 타다가 휴대폰을 수장시키고 얻은 혼돈과 평화


새로운 폰을 셋업 하기까지, 약 2주가 걸렸다. 그 시간까지 난생처음 폰이 없는 상태로 지냈다. 그 의미는 지금까지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야 된단 의미였다. 새삼 폰이 없으니, 이 조그만 기계로 정말 별 걸 다 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카드 없이 결제도 하고 이메일 업무도 보고 이북도 읽었는데 이제는 이 ‘원터치’  소스들의 근원점을 찾아 돌아가야 했다. 일단 지하철을 타고 장을 봐야 하니 지갑 속에 묵혀두었던 카드를 꺼냈고, 업무와 메시지는 물론 음악 재생, 레시피 찾기, 영화 보기 등을 위해 무조건 랩탑을 이용해야 했다. 랩탑을 열지 않으면 현실 너머의  세계가 단절되니 깨어 있는 시간 내내 계속 열어두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당장 연락이 안 돼서 큰일 날 관계도 없었으며, 얘가 왜 SNS에서 사라졌지 하며 기민하게 나를 찾는 친구들도 없다는 것. 업무는 이메일 혹은 PC 카톡과 아이메시지로도 충분했다. 세상과 연결이 안 될까 봐  동동거린 건 나 혼자 뿐이었다.   


먼지만 쌓이던 책장을 쓱 둘러봤다. 언젠가 완독을 기약하며 한두 챕터 읽다가 그만둔 책들이 화석처럼 줄을 지어있었다. 손이 가는 데로 몇 권을 뽑아 한 장 두 장, 읽기 시작했다. SNS의 짧은 글 쓰기와 읽기에 절여졌던 뇌는 호흡이 긴 글을 읽기 시작하자 잡생각이란 공격을 퍼부었다. 그럴 때마다 자세를 곧추세우고 한 문장 한 문장 온전히 집중할 때까지 천천히 읽어 나가다 보니, 목과 허리가 좀 피곤해졌다.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곧장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작가의 다른 이야기. 신기하게 금세 다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폰이 아닌 세 가지 책을 자기 전까지 돌려 읽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꿀잠을 잤다. 숏폼릴만 무한정 돌려볼 때는 뇌에 곰팡이가 피는 느낌이었는데, 이날은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날 밤의 기분 좋은 피곤함으로 가득했다. 


돌려 읽었던 세 권의 책. 소설, 에세이, 실용서 등의 다양한 장르를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폰이 없는 처음 며칠은 루틴처럼 체크하고 돌려보던 SNS를 못하니, 사람들과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딱히 그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것도, 혹은 실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말이다. 가짜 외로움이란 것을 깨닫고, 정보의 과부하에서 벗어나니 하루가 단순해졌다. 그리고 깊어졌다. 


운동을 할 때도 노래를 듣거나 유튜브 홈트를 보고 따라 하는 대신, 근육 하나하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더 섬세하게 지켜봤다. 종이책을 더 자주 들춰보고,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집 청소도 꼼꼼히 하게 되었고, 쓸고 닦는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됐다. 또 그렇게 떠오른 생각들은 그때그때 노트에 부지런히 적었다. 무엇보다, 쇼핑을 거의 안 하게 됐다. 


지금은 예쁜 연보랏빛의 새 폰과 함께다. 예전에 쓰던 모든 앱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상 복귀되었다.  SNS 활동은 다시 호황이다. 하나 변한 건, 아침에 눈 뜨고 밤에 눈 감을 때를 장식하던 폰과의 습관적인 동거가 끝났다는 것. 관성을 찾아가려는 버릇을 억제하는 데 생각보다 의식의 힘이 많이 필요하지만, 요즘은 어딜 가나 종이책과 작은 노트와 펜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엔 그간 찍은 사진과 영상을 돌려보며 바로바로 정리한다. 


삶은 여전히 쉽지 않고, 세상엔 잘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정보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는다. 폰 없는 아날로그로 산 2주의 시간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니까. 강은 폰을 가져간 대신,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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