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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련 Aug 17. 2023

영국이 불편했던 이유

계층이나 급이나… 뭐가 달라?



2020년 가을, 영국인 남편과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배우자 비자를 발급받은 뒤 해가 나지 않는 추운 겨울에 영국행 비행기를 탔다. 우리가 살 곳은 남편의 직장이 있는 런던. 남편이 알고 지내던 50대 친구가(나이로만 따지면 남편이 자식뻘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친구'라고 불렀다.) 주택 한 채와 플랫(flat, 영국에서 아파트 형태의 집을 부르는 말) 두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전 세입자의 계약이 끝날 때가 되었다며 우리에게 본인의 플랫 한 채를 빌려주고 싶다는 제안을 해 왔다. 남편을 좋게 본 집주인 친구 덕분에 우리는 발품을 팔지 않고도 런던 중산층의 서민들이 사는 조용한 동네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집주인 친구에 대해 설명하자면, 인도 출신의 50대 초중반의 남자로 영국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자동차 회사 포드에 엔지니어로 취업해 인생의 반 이상을 영국에서 보낸 시민권자이다. 그의 부인 역시 대학 진학을 위해 영국으로 이주했고, 남편과 마찬가지로 영국 시민권을 받은 인도계 영국인이다.


남편 말로는 요즘에야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이 많아 고연봉을 받기가 힘들지만, 집주인이 대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컴퓨터를 아는 사람이 소수여서 포드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꽤 고연봉을 받았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나이 오십이 되자마자 은퇴를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일찍 은퇴하는 것이 부러워할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부 모두 이십 대 중반에 결혼하여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인도계다운 교육열로 두 아들 모두 사립학교에 보냈다고 했다. 영국 사립학교는 1년에 학비만 4,5천만 원이라고 하던데 자식들에게 그런 엘리트 교육을 시키고도 집을 세 채나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니,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대학도 한 명은 옥스퍼드, 다른 한 명은 런던 정경대를 졸업했다고 했으니 그 부부는 자신들의 삶이 분명 성공한 자의 것임을 자부하며 살지도 모르겠다.




단 한 가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점이 있다면 집주인 부부가 우리에게 주던 선물 같지 않은 선물 때문이었다. 런던 생활 초기에 그들은 종종 우리에게 '아직 쓸 만하다'며 코팅이 다 벗겨진 코팅 프라이팬을 주었고, 또 다른 날엔 유리병에 든 소스를 다 쓰고는 '유리니까 버리기 아깝지 않느냐'며 빈 유리병을 가져다주었다. 가끔은 이미 포장을 뜯은 이름 모를 나라의 과자를 주거나, 도대체 용도를 알 수 없는 새것이 아닌 소스를 준 적도 있다.


평소 코팅팬의 코팅이 조금이라도 벗겨지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찝찝해서 김을 굽거나 고구마를 구울 때만 사용하는 편인데, 코팅이 '조금 벗겨진' 게 아니라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코팅팬을 선물 받던 날엔 거의 울 뻔했던 기억이 난다. 속상한 마음에 그 부부를 탓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마음을 돌려 '이렇게 절약하며 살았으니 런던에 집이 세 채나 되는 걸 거야.'라고 생각하며 코팅 없는 코팅 프라이팬을 주방 서랍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여러 번 선물 같지 않은 선물을 받고도 집주인 내외에게 좋은 마음을 내려고 애썼지만, 결정적으로 이 부부를 향한 마음을 접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날은 우리 집으로 그들을 초대해 내가 만든 당근 케이크와 친정아버지가 직접 덖으신 녹차를 대접한 날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남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나의 시아버지께서는 영국에서 이름난 사립학교 출신인데, 그 학교 이름이 나오자마자 두 사람의 눈빛에 놀라움과 경외심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한국 사람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두 사람에게는 큰 변곡점이었음에 틀림없었다.


런던에 정착한 후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지금 여기, 벨기에 브뤼셀로 발령이 결정되었다. 남편은 또래 동료들에 비해 월등한 성과를 보여 모두의 시기어린 축복을 받고 런던을 떠나게 됐다. 그 부부의 플랫을 떠나기 전 함께 했던 마지막 식사에서 남편과 나를 대하는 태도와 눈빛이 확연히 달라진 것이 영 불편했던 건 아마 나뿐이었던 것 같다.




인도계 영국인 부부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며 '영국이 불편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 속에 오로지 '나'만 불편했다는 것이 주목하고 싶은 점이다. 평소 남편과 나에겐 공통점이 더 많지만, 가끔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확실히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페인 여행 중 스낵 트럭 앞)

남편 : (물 2병 주문 후 결제하는 중)

영국 여행객 : (다가와서) 물 한 병만 주세요.

주인 : 큰 걸로 드릴까요? 작은 걸로 드릴까요?

영국 여행객 : Umm... Large, please. 음... 큰 걸로 주세요.

남편 : (주문한 물을 받아 나오면서) 노동자 계층(Working Class)이네.

나 : 저렇게 짧은 문장만으로도 알아?

남편 : Large- 라고 하잖아.

나 : (도저히 뭐가 다른 건지 알 수 없음).....?


영국 영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발음에 따라 집안 배경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남편의 조부모님과 시아버지께서는 포쉬(Posh, 영국 상류층) 발음을 사용하시는데, 가세가 기울어서 공립학교를 다녔던 남편은 포쉬와 일반 억양이 섞인 발음을 구사한다. 집에서는 포쉬 발음을 듣고 학교에서는 보통의 발음을 듣고 자라 두 가지 발음이 섞였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노동자 계층이네.' 라는 말이 그 영국 여행객을 낮춰 보고, 무시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음을 안다.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하자면, 서울 토박이가 부산 방언을 듣고 '저 사람은 경상도 출신인가 보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루는 남편이 이런 질문을 했다.

남편 : 한국어도 발음을 들으면 그 사람의 계층을 알 수 있지 않아?

나 : (신경질적으로) 발음만 듣고 어떻게 돈이 많은지 적은지 알아? (버럭)

남편 : '계층'은 '돈'이 많다는 걸 뜻하는 게 아냐. 교수나 의사, 정치인처럼 사회 지도층의 발음이 일반 사람들하고 다르지 않느냐는 질문이라고.

나 : (당치도 않는 소리에 어이 상실) 한국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아나운서나 앵커, 방송 기자쯤이 되겠네. 그렇지만 그들이 네가 말하는 높은 계층은 아니야. 게다가 지방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사회 지도층이 된다고 해서 발음을 바꾸는 일도 없어.

남편 : 아,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


내 상식을 벗어난 질문에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온 건, 오랜 외국 생활로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내 말투엔 여전히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는 것 처럼 방언은 표준어의 하위 개념이 아니다. 어떤 것이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 방언이 표준어보다 덜 고상한 말로 취급받는 것처럼, 노동자 계층의 영어 발음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태어나자마자 방언부터 배운 사람의 분통함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부산, 서민의 딸로 태어나 가끔은 부족하고 가끔은 평범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내가 가장 불편했던 상황은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을 볼 때였다. 한국에서의 '강'은 주로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뜻했다. 어쩌면 이미 자본주의와 한몸이 된 사회에서 급을 나누는 상황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나 같은 사람이 사회 부적응자로, 점차 도태되어 사라질 일만 남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국과 영국의 상황은 다르다. 한국의 '계층'에서는 '돈'이라는 가치가 빠질 수 없는 반면, 영국의 '계층'은 '돈'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스물아홉 해를 살며 급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지쳤던 내게, 영국 속 또 다른 계층론의 발견은 다시금 힘이 쭉 빠질 만한 사건이 되었다.


지금은 남편의 일 때문에 벨기에 브뤼셀에 정착하여 살고 있지만, 언젠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옮겨 갈 그곳이 영국은 아니길 바라는 영국 남편을 둔 한국 아내의 마음이 너무나 웃프게 느껴지는 건, 당사자인 나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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