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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토리아 Nov 21. 2024

#30 6차 항암 (2)

고요한 바다

 6차 항암을 끝내고 받을 ‘자가조혈모세포이식‘ 설명을 위해 이식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병실에 오셨다. 모든 림프종 환자가 항암 후에 조혈모세포이식을 받는 건 아니다. 아형에 따라 다른데 내 아형은 조혈모세포이식까지 받아야만 하는 아형이다.

 조혈모세포이식은 ‘골수이식’으로 알려진 치료법인데, 옛날에는 정말 골수에서 뽑았기에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헌혈하듯 뽑는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골수검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쳐서 다시는 골수에 바늘을 꽂고 싶지 않다.

 조혈모세포이식에는 ‘자가’와 ‘동종’ 두 가지가 있는데, ‘자가’는 말 그대로 내 조혈모를 채집해서 얼려두었다가 다시 내 몸에 넣는 거고, ‘동종’은 가족 혹은 타인이

조혈모를 기증하면 그 조혈모를 내 몸 안에 넣는 치료법이다.

 나는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을 하는데, 이 치료를 하는 목적은 기계 검사로는 보이지 않는 남아있는 암을 죽이기 위해서고, 재발률을 낮추기 위해서이다.

 혈액암은 암 중에 재발률이 가장 높은 암이다. 특히나 내 아형은 말할 것도 없다. 내 아형에 대해 공부하다가 알게 된 재발률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항암을 할 의지를 잃게 될까 봐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 너무 무서워서 글로 적고 싶지 않을 정도로 높은 재발률을 아주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서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해야 하는 치료이다.

 아마 내가 이식을 해야 한다는 걸 발병 초기에 알았다면 ‘왜 나는 하필 걸려도 이딴 걸 걸려서 항암으로 안 끝나고 이식까지 해야 해!’ 하며 많이 원망했을 것 같다. 하지만 4차 항암 후에 교수님께서 6차 끝나고 조혈모세포이식을 하자고 말해주셨기에 이식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더 컸다. 항암제가 불응이 되거나 내성이 생기면 이식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은 채집-항암-이식 순으로 이뤄진다. 6차 항암을 마치면 2주간의 휴식기를 가진 후 다시 입원을 해 목에 히크만이라는 관을 삽입한다. (이로써 나는 C-line, 케모포트, 히크만까지 다 경험하게 된다) 그 관을 통해 피를 뽑아 조혈모 채집을 하는데 사람마다 채집되는 양이 달라 하루 만에 끝나는 사람도 있고, 3일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채집이 끝나면 무균실에 들어간다. 무균실에 들어가면 3주 정도 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내가 있는 병원에는 보호자가 필수여서 엄마와 함께 들어간다. 무균실에서 6일 동안 고강도항암을 받는데, 이 항암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항암의 10배라고 한다.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10배라고? 설명을 듣는 순간 너무 무서웠다.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미래의 내가 너무 걱정되고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우리 엄마도 너무 불쌍했다.

 이 항암을 하고 나면 몸의 면역 기능이 0이 되기에 작은 먼지에도 폐렴이 올 수 있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감염이 되어 목숨이 위험할 수 있기에 무균실에 들고 갈 수 있는 물건들도 엄격하다. 무조건 새 제품 이어야 하고, 보호자의 옷 같은 경우는 먼지 안나는 면 소재의 긴팔, 긴바지를 삶아서 건조해서 준비해야 한다. 외부 음식은 캔음료 외엔 반입  금지이고, 무조건 종이컵에 따라 마셔야 하며 한번 개봉하면 버려야 한다.

 면역력이 떨어지기에 100퍼센트 설사를 한다고 한다. 소장절제수술 후로 다시는 안 할 줄 알았던 기저귀를

다시 차야만 한다. 그리고 구내염 또한 와서 침 삼키는 것 또한 힘들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전처치항암을 마치고 나면 얼려두었던 조혈모세포를 이식하게 된다. 이식 자체는 헌혈하듯이 이뤄진다고 한다. 그리고 호중구가 1000까지 오르면 드디어 무균실을 탈출할 수 있고, 일반 병동으로 가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상태까지 몸이 회복을 하면 퇴원을 할 수 있다.

 퇴원 후에도 3개월 동안은 감염에 취약하기에 제약이 많다. 화분의 흙을 만졌는데 감염이 돼 응급실에 온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식 후 생활관리는 이식이 끝났을 때 한번 더 교육을 받는다.

 이식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여기까지 설명을 하고 질문 있냐고 했는데 당장 떠오르는 질문은 없었고 그저 두려웠다. 선생님이 병실을 나가고 엄마한테 “나 무서워 “라고 하니 엄마가 “나도 무서워. 우리 같이 무서워하며 해보자 “라고 했고,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 항암을 시작하기 전에도 얼마나 무서웠던가. 하지만 덜덜 떨고 울고 소리치고 괴로워하면서도 6차까지 오지 않았던가. 자가조혈모세포 이식도 마찬가지겠지. 엉엉 울면서 해봐야지. 어쩌겠어. 이게 나에게 주어진 삶이고 나는 이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12년 전쯤인가... 언니랑 둘이 푸껫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펀다이빙으로 처음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선 너무 재미있어서 자격증을 따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몇 년 후, 혼자 태국 꼬따오에 가서 스쿠버다이빙 오픈워터 자격증을 땄고, 몇 년 후에 또다시 꼬따오에 가서 어드밴스 자격증까지 땄었다.

 뱃멀미가 심한 나는 다이빙 포인트까지 가는 길이 고역이었다. 하지만 배에서 뛰어내려 파도 없는 고요한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바로 멀미가 사라진다. 바닷속에서는 내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참 좋았다.

 항암을 하면서 스쿠버다이빙 생각을 많이 했다. 오심으로 괴로울 때는 다이빙 포인트까지 가는 배 위라고 생각했다. 이 고통의 끝에는 고요한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버티고 버텨 6차까지 왔고, 오늘은 그 6차의 마지막 항암제가 내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자가조혈모세포이식, 그거 한 번만 더 하면 된다. 그러면 파도 때문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뛰어내려 고요한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바닷속에서 들리는 나의 숨소리로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것이며 바다 깊은 곳까지 들어와야지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을 만끽할 것이다.

 그래. 나는 또 해낼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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