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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Feb 08. 2019

어쩌면 피사의 주인공은
_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당분간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어요

4. 어쩌면 지금 떠나야  이유가 필요할지도 모를 당신에게.


“부산!”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신사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듣자 무척 반가워했다. 은퇴 후 아내와 함께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며 자신들을 소개한 그는 지난해 일본과 대만 그리고 한국을 경유하는 아시아 크루즈 여행을 한 적이 있단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카메라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내 나이쯤 기자 생활을 했다며 사십여 년 전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우리는 한동안 어깨를 맞대고 중간중간 귓속말까지 해 가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카페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피사로 향하는 버스들이 터미널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멋진 여행을 하라는 신사다운 인사로 먼저 내게 작별을 고했던 그가 잠시 후 마지막으로 꼭 할 말이 있다는 듯 한 번 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작은 소지품 가방 끈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어깨로 보낸 신호였다.

 “이만큼 시간이 지나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이제야 피사를 찾은 것이라네. 내겐 지금 나와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자네의 젊음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몰라. 앞으로 더 많이 다니고, 경험하게. 지금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을 테니. 그것을 자네가 발견하길 기도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내외는 카페를 나섰고 곧 버스 주위에 몰린 인파 속에 묻혔다. 당연하게도 다시 그를 볼 순 없었다. 다른 시각, 다른 버스를 탄 우리가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에서 마주친다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촉박한 시간에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은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책에서만 보던 피사의 사탑(Torre di Pisa)에 기대했던 굉장함은 없었다. ‘아, 정말로 기울어져 있긴 하네.’ 이리 보고 또 저리 봐도, 그리고 곁에 세워진 피사 대성당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기울어진 탑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팩트 체크’ 정도의 의미였달까. 그보다는 미라콜리 광장(Piazza dei Miracoli)에 입장하기 전 교육이라도 받았는지 탑이 세워진 방향으로 손가락 하나를 펼치거나 입을 쩍 벌려 비슷비슷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흥미로웠다. 물론 나도 그들 사이에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울어진 종루를 받치는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언제 또 피사에 와 보겠어’라는 핑계였다.

 리보르노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올 때와 달리 조용했다.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채운 성취감이 선사한 단잠에 승객들 태반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반대로 내겐 도착할 때까지 졸음 한 번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 이유 역시 그들과 같았다. 한 시간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정겨운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나는 수첩에 짧은 하루를 갈무리했다. ‘지독히도 운 좋은 하루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그날 메모의 마지막엔 피사의 사탑도, 대성당도 아닌 노신사의 마지막 말이 적혔다. 나를 위한 격려 혹은 진심 어린 그의 고백 같은 그 문장들을 곱씹으며 나는 여행을 좀 더 이어가 보기로 했다. 그가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 ‘어쩌면_할 지도’ 본문 .




 모르긴 몰라도 제가 처음 이 탑을 본 날이 제 가장 오래된 기억보다도 앞서있지 않을까요. TV나 거리 광고판 속 사진, 만화 영화 속 배경으로도 피사의 사탑은 너무나 흔히 등장하는 건축물이니 말이죠. 나 홀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모습이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도 익숙한 터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일주일의 항해 일정 중 피사가 포함돼있지 않았다면 건축물의 기울기를 재러 여행을 떠나는 일은 아마도 제겐 없었을 거예요.


 1173년부터 1178년, 다시 1272년부터 1278년 그리고 1360년부터 1372년까지. 피사의 사탑은 세 차례의 공사를 거치며 199년 만에 완공됐습니다. 백 년 씩이나 공사가 중단된 이유는 모두가 유추할 수 있듯 공사 중인 건물이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끝끝내 완공해 낸 것이 어찌 보면 대단합니다. 비록 원래 예정보다 높이를 낮춰야 했지만요.

 완공 후에도 이 탑은 계속해서 아주 조금씩 기울었다고 합니다. 위기감을 느낀 이탈리아 정부는 1900년대 들어 전 세계에 도움을 요청했고, 기울어지는 쪽 반대편의 지반을 파내 균형을 맞추는 방법으로 2001년 최종 보수 작업을 마쳤습니다. 건축사의 불가사의로 불렸던 기울어진 탑이 830년 만에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는 탑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사 후 아주 조금씩 바로 서고 있는 바람에 수백 년 후에는 곧게 선 탑이 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피사 시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벌써부터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백 년 후쯤 피사의 사탑에 또 한 번의 보수 공사가 시작되지 않을까요? 탑이 바로 서는 것을 방지하는 공사 말이죠. 여전히 피사의 사탑이 조금씩 쓰러져가고 있다고 알고 있던 제게는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높이 55m의 탑은 이야기 속 소감처럼 정말로 비스듬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진과 TV에서 보던 것보다 더 삐딱했습니다. 기울기가 약 5.5도라고 하는데, 지면에서 멀어질수록 그 정도가 커지다 보니 관광객이 몰려있는 꼭대기는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더군요. 하지만 그것 외엔 사실 피사의 사탑은 그다지 흥미롭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탑이 기울어진 이유가 설계상의 결함이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 탑에서 했던 실험 역시 지어낸 이야기였다는 사실이 상심을 안겨주기만 했죠.

 오히려 이 날 피사의 진짜 볼거리는 기울어진 탑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이었습니다. 마치 광장에 들어서기 전 교육이라고 받고 온 듯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어찌나 재미있던지요. 탑을 배경으로 손가락을 세우거나 팔을 뻗어 기운 탑을 받치고 있는 듯한 포즈가 일반적이었고, 더러는 있는 힘껏 입을 쩍 벌리거나 아예 길바닥에 드러눕기도 했습니다. 미리 준비한 찻잔이나 아이스크림 콘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고요. 그래서 그날의 사진들엔 탑보다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피사를 떠올리면 피사의 사탑보다 그들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이제 피사의 진짜 볼거리는 기울어진 탑 주위로 펼쳐진 연기 경연이라고 해야겠어요.



 우연히 만난 노신사의 진심 어린 한 마디에 당분간은 여행을 계속하겠노라 다짐했던 그 날, 버스의 목적지는 이탈리아 피사였지만 여행의 배경은 ‘지금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을 가리킨 그의 문장과 각자의 몫을 품에 안은 이들의 미소였습니다. 덕분에 고작 두어 시간 머문 그 광장이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죠.

 미라콜리 광장의 주인공 피사 대성당보다 성당의 종루인 피사의 사탑을 보기 위해 오늘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모이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낯선 도시와 풍경 못지않게 그곳에서의 내 모습과 만나게 될 인연, 주워 담아 올 울림들을 기대하며 이 순간에도 간절히 여행을 꿈꿉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 여행이 필요한 진짜 이유일지도 모르겠어요.


주소 : Piazza del Duomo, 56126 Pisa PI

전화번호 : +39 050 835011

홈페이지 : opapisa.it

이용 요금 : 18 €

영업시간 : 화-일 AM 10:00 - PM 6:00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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