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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08. 2021

벚, 꽃잎, 자국.

어떤 이별 후에 남은 것


연분홍 꽃잎 하나가 날아올랐다.

한 뼘 채 되지 않는 수첩 틈새로부터.

막 주인을 찾은 날개처럼 팔랑이며.

머물다 간 자욱만 종이에 남기고.


 여수항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터미널 입구에 늘어 선 버스 무리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창 밖에 둔 내 시야가 서서히 걷히고 사각 틀 속으로 새 계절의 풍경들이 한 장씩 빠르게 지나갔다. 앞다퉈 고개를 내미는 수줍은 색의 꽃들과 잎 더미. 그 맘 하나라도 놓칠까 분주히 눈 맞추는 나. 환하게 물든 버스 안 공기는 또 어찌나 따뜻하던지. 남쪽 지방엔 이미 봄기운이 몇 꺼풀 내려앉아 있었다.


 느긋하게 시골길을 지치던 버스가 잠시 후 내리막길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럭저럭 잘 닦인 도로였는데도 낡은 버스에겐 버거웠던 모양이다. 차는 덜컹이기 시작했고 띄엄띄엄 창가에 앉은 노년의 승객들이 리듬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뒷바퀴 쪽 좌석 위에서 내 엉덩이는 아예 공중에 뜨고 앉기를 반복했다. 그 광경이 어딘가 정겨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였다. 한 뼘쯤 열어 둔 창문 틈 새로 꽃잎 하나 날아든 것이. 분홍색 옅게 머금은 벚꽃잎이었다.

 그것은 진공에서처럼 눈앞에 한참을 떠 있다가, 고요한 대지에서처럼 찬찬히 떨어졌다. 무릎 위 펼쳐 놓은 수첩에 내려앉을 때까지 내 눈은 그저 잎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쫓았다. 늘어진 가지가 창문에 스치는 요란한 소리도 잠시간 들리지 않았다. 괜스레 특별했고, 애틋하기도 했다. 수십, 수백만으로 흐드러진 숲에서 내게 온 그 하나가. 나는 생기가 짓눌리지 않도록 조심히 집어 수첩 끝자락의 빈 페이지 사이에 끼웠다.

 남도의 봄은 매일 눈에 띄게 짙어졌다. 땅 끝 섬에 뜬 빨간 동백 구름은 섬을 나설 때쯤 희미해졌고 광장의 노을은 어제오늘의 농도가 달랐다. 하루가 가장 먼저 닿는 절벽에선 금화와 파도 반짝이는 빛에 눈이 멀 듯한 경험도 했다. 그 순간마다 품 속엔 버스에서 만난 꽃잎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 인연이자 여행을 함께 한 벗으로. 갖가지 색과 향에 흠뻑 젖어 몸 가누기 힘들 때면 이런저런 감상들을 넌지시 그에게 건넸다. 이 행운들의 시작이 그와의 만남이라 여기며.


 돌아온 뒤에도 수첩은 변함없이 재킷 주머니와 가방 속에 있었다. 몇 다발의 일상과 여행을 엮는 동안 습관처럼 적은 생각, 하루하루 새긴 일기들로 매일 조금씩 부풀었다. 꽃처럼 예쁜 장면들도 사이사이 끼워졌다. 하지만 여수서 고이 품은 수첩 속 꽃잎의 존재는 점차 희미해졌다. 이상하리만치 그를 떠올린 날도, 열어 보는 일도 없었다. 시간 제법 지나 다시 그 페이지를 편 것도 그저 생각이 그만큼 쌓여 닿았을 뿐.

 때마침 얄궂은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불었고, 꽃잎은 멀리 날아갔다. 마지막 눈 마주칠 새도 없이. 뒤이어 초여름 풀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한참 동안 양 손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고 동네 개천가를 서성였다. 벚꽃 다 떨어진 자리 녹음으로 빽빽하게 메꿔진 지 오래였다. ‘분홍색 잎 있기만 하면 보일 텐데. 보이기만 하면 되찾을 텐데.’ 이미 아득히 날아간 걸 알면서도 혼잣말하며 두리번거렸다. 쪼그려 앉아 잡초와 흔한 꽃들 무리를 노려 보는 내게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뭐 중요한 것을 잃었느냐고. 평소 같으면 머쓱해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을 텐데 그날은 형용할 수 없는 무거움에 쓴 미소만 지었다.

 돌아온 벤치 위엔 수첩이 펼친 그대로 놓여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 쩍 벌린 모습이 어쩜 그리 야속하던지. 무심히 서 있는 맞은편 아파트와 전봇대. 평온한 표정으로 벤치 앞뒤를 지나치는 사람들. 둘 곳 없는 시선이 결국 다시 얄미운 수첩, 텅 빈 페이지에 닿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로 노랗게 물들어 마치 노을 진 언덕 같았다. 그 위에 패인 몹시도 작고 얕은 우물이 보였다. 꽃잎 있던 자리에 남은 자국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짧은 생각 뒤에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희미한 테두리를 따라 선을 그었다. 옅은 흔적마저 사라질까 단숨에 그렸다.


크기도 모양도 원래와 다른 삐뚤빼뚤한 그림이 덩그러니 종이에 남았다.

늘 곁에 있었으나 잠시도 함께인 적 없었던 시절이 맘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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