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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15. 2021

라이프 이즈 셔플

그 시절 내 위로가 불어왔던 곳

 누구든 안 그랬겠냐만 나 역시 음악 듣는 것이 학창 시절 가장 큰 낙이었다. 매일 저녁 여덟 시면 카세트 라디오의 빨간색 녹음 버튼 반쯤 누르고 오늘의 첫 곡을 기다렸다. DJ의 곡 소개가 전주에 섞일까 바르르 떨었던 손끝의 진동이 생생하다. 그게 뭐라고 눈까지 감고 온 신경을 쏟았던지. 보물이라도 찾은 양 환호했는지. 그래도 그 노래들이 방문 소리에도 오르락내리락하던 사춘기 감수성을 어르고 달랬다.

 대학생이 된 개강 첫 주말엔 용산 전자상가에 갔다. 길어진 통학 시간을 핑계로 전부터 갖고 싶던 mp3 플레이어를 사기 위해서였다. 그땐 몰랐다. 그때 거기서 갓 스물 애송이가 얼마나 탐나는 먹잇감이었는지. 여지없이 나도 판매점 직원의 꾐에 빠져 중국산 mp3 플레이어를 쥐고 돌아왔다. 대여섯 곡 겨우 들어가지 않는 16MB 용량에 다음날 건전지 덮개가 부러진 형편없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어디서든 좋아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마냥 꿈만 같았다. 쉬는 시간에도 공강 때도 그 녀석부터 찾았다. 지하철과 버스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태생이 부실하던 녀석은 얼마 안 가 완전히 고장 나 버렸다.

제대로 된 mp3 플레이어는 두 번째부터였다

 두 번째이자 가장 오래 사용했던 mp3 플레이어는 제대 전 마지막 휴가 때 생겼다. 삼 년만의 용산 설욕전 끝에 거머쥔 것은 화면 없이 버튼 다섯만 있는 독특한 제품. 후보들 중 석 달치 병장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한 가지 이유를 더 꼽자면 포스터에 적힌 ‘Life is shuffle - 인생은 제비뽑기’란 소개 문구가 마음에 쏙 들었다. 후에 찾아보니 shuffle이 아니고 random이었지만. 무튼 그 말에 음악 듣는 시간이 특별해질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꿈틀거렸다. 모든 곡을 무작위로 재생하는 제멋대로인 모습마저 매력적이었다.

 예상은 적중했고 매일 아침 이벤트가 벌어졌다. 집을 나서며 주머니 속 주크박스를 더듬어 전원 스위치를 켜고, 재생 버튼을 누른 뒤 음악이 흘러나오기 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은 그즈음 즐겨 듣던 혹은 그날따라 듣고 싶은 노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혹시, 어쩌면, 설마, 하는 맘으로. 사실 수백 곡 모두가 애청곡이었는데도 바라 마지않는 어떤 곡이 늘 있었다. 물론 그 곡이 첫 번째로 나온 날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어서 대체로 맘에 드는 노래가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다음 버튼을 눌러야 했다. 가끔 운이 좋아 네댓 번 만에 기다렸던 전주가 들릴 때의 전율이란.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녀석은 꽤 튼튼했다. 덕분에 이십 대의 많은 날들을 가슴 두근거리며 시작할 수 있었다. 긴긴 불면의 밤도 함께 새웠다. 평생 채울 수 없을 것 같던 512MB 용량이 결국 부족해졌다.


 여느 날처럼 노래 들으며 나선 길에 녀석이 떠올랐다. 한동안 서랍 열 때나 마지못한 안부 나누던, 그마저도 언젠가부터 사라진 하얀색 주크박스. 그 시절 듣던 노래가 나를 그 언저리에 끌어다 논 걸까. 그사이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이제 커다란 화면 속 현란한 앨범 아트들을 눈으로 골라 듣는 게 자연스럽다. 남들이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엿듣다가 더듬더듬 입가에 맴도는 노래 제목을 검색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남은 용량 계산하며 무얼 솎아낼까 고민했던 기억은 까마득하다. 무엇보다 그때만큼 음악을 듣지도,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지도 않게 됐다. 세상 모든 음악들을 언제고 들을 수 있게 됐는데도.

 몰려온 갈증에 걸음을 돌렸다. 책상 서랍을 여니 흠집 투성이에 빛까지 바랜 mp3 플레이어가 몇 개 보였다. 매일 나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녀석은 없어도 다들 나의 한때를 채워 준 친구들이다. 눌러도 반응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날 골라 선을 연결하니 곧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모자에 가방까지 둘러멘 그대로 이어폰을 찾아 헤매는 동안 어찌나 설레던지. 딸깍딸깍 버튼 소리 뒤로 적막 대신 가슴 뛰는 소리가 들렸고 곧 그 시절 유행가의 전주가, 아침의 설렘이 흘러나왔다. 반가운 곡들을 종일 들었다. 다음 누를 때마다 바뀌는 옛 바람과 한숨, 그리움을 따라 흥얼거리며 공원을 걸었다.

요즘은 이걸로 듣는다. 그 시절 이야기들을. 

 사는 게 그렇다. 무작위로 흐르고 맥락 없이 방향을 튼다. 그 위에 올라 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되도록 좋은 곡들을 채워 넣고 맘에 드는 것 나올 때까지 다음, 다음 외쳐 보는 정도. 그래도 언젠가 내가 바라 마지않는 음이 기어이 울려 퍼지리라. 뺨에 스친 바람에도 상처 날까 두려웠던 날 어떤 노래 살갑게 불어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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