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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29. 2021

오늘도 냉장고 앞에서 한숨을 쉰다.

나는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게 될까

냉장고 앞에서 한숨을 쉰다.
너덜너덜 뜯긴 우유팩을 본다.


 저녁 내 미뤄 둔 원고를 시작하려니 기다렸다는 듯 속에서 신호를 보냈다. 자정이 갓 넘은 때였다. 아무래도 허기부터 달래야겠다 싶어 거실로 나왔다. ‘작업은 또 일이십 분 뒤로 밀리겠구나.’ 혼잣말을 하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주황색 불빛, 쩌억 하는 소리가 새까만 정적을 깼다. 허리 숙여 한 바퀴 둘러봐도 냉장고 안에 간식거리라곤 없었다. 그나마 눈에 띈 건 문 안쪽 선반에 놓인 기다란 우유팩. 하나는 아직 열지 않은 새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입구가 지저분하게 뜯긴 채 벌어져 있었다. 셰이크용 플라스틱 병을 찬장에서 꺼내 우유를 따랐다. 옆으로 터진 입구 따라 내용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조금씩 천천히. 쪼로록 소리 그리고 얕은 한숨 소리가 텅 빈 거실 안을 채웠다.


 부자의 냉장고에 우유만큼은 떨어질 날이 없다. 아버지는 식사 후 후식으로 우유에 미숫가루를, 아들은 매일 아침 식사 대신 단백질 셰이크를 타 마신다. 1000 밀리리터 팩 두 개 묶음이 짧게는 사나흘이면 동나는데, 때맞춰 채워 넣는 것이 둘 사이 암묵적인 룰이다. 누가 사 온다 따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어서 어떤 날엔 우유팩 네댓 개가 선반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아버지가 먼저 우유를 사 온 날엔 여지없이 입구가 뜯기듯 열려 있다. 그날 밤 아들은 그걸 보고 한숨을 쉰다. 그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한 번도 깨끗하게 우유팩을 뜯은 적이 없다. ‘입구 양쪽 끝을 밀면 쉽게 열려요.’ 한 번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우유팩 여는 방법을 설명할까 했지만 곧 속으로 삼켰다.


“아빠는 이런 거 못 써. 지문이 다 닳아서.”


 몇 년 만에 아버지가 새 휴대폰을 구입한 날이었다. 아들은 아버지 옆에 앉아 지문 인식으로 잠금 화면 여는 방법, 은행 앱에 접속하는 방법들을 설명했다. 이제 장부에 적어 둔 비밀번호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아버지의 얼굴을 봤다. 그가 기쁜 표정을 짓길 바랐다. 하지만 몇 분 후 아버지가 휴대폰을 들고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지문 인식 기능을 해제해 달라 말했다. 화면에는 지문 인식 실패 횟수가 초과됐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휴대폰을 넘겨받으며 아들은 오랜만에 아버지의 손을 보았다. 아들의 나이만큼 긴 시간, 힘들고 험한 일로 네 식구 생계를 지탱한 손은 두껍고 거칠었다. 나무껍질처럼 깊은 주름과 빛을 잃은 몽당 손톱. 엄지 손가락 지문은 한눈에 봐도 뭉개져 형태가 없었고 피가 맺힌 건지 울긋불긋한 자국들도 보였다. 저 손으로 제대로 된 감촉을 느낄 수나 있을까, 아들은 순간 눈 언저리가 화끈거려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손을 잡았던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스물두 살 되던 해. 날짜는 사 월 십 구일이었다. 훈련소 입소 안내 멘트와 사람들의 함성, 울음소리로 어지럽던 운동장에 서 있는 까까머리 아들에게 아버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녀와라.”

“다녀올게요.”


 지극히 경제적인 문장으로 인사하며 했던 악수.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후 이십 년이 다 되도록 아버지 손을 잡는 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 됐다. 어쩌다 물건을 주고받을 때도 일부러 손이 닿지 않게 조심할 정도로. 처음엔 그저 무뚝뚝한 부자간에 살 닿는 게 생각만 해도 간지럽고 어색한 것뿐이었는데 요즘은 어쩐지 두렵다. 그의 거친 피부가 닿으면 무언가 속에 있던 게 왈칵 쏟아질까 봐. 나도 나지만 혹 그가 애써 누르고 있던 것이 무용지물이 될까 무섭다.


 다시 방에 들어가기 전 냉장고 문을 열고 새 우유팩을 꺼냈다. 입구를 양 손으로 벌리고 양 끝을 오므리니 깨끗하게 열린다. 그대로 다시 닫아 냉장고에 넣었다. 오늘은 이만큼  두자.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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