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경달다 Mar 17. 2024

사소함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그림책 <추위를 많이 타는 펭귄>을 읽고

  그림책 <추위를 많이 타는 펭귄>의 앞표지에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가만히 보면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펭귄 한 마리가 한가운데 떡하니 서 있다. 무표정한 얼굴이라서 어떤 마음인지 도통 가늠하기도 어렵지만 하여튼 뭔가 예사롭지 않은 포스에 이끌려 서둘러 책장을 넘겨본다.

  

  뻔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오랜만에 설렌다. 두둥!


  어마어마하게 시린 하늘 아래 멀고 먼 눈과 얼음의 땅에서 수많은 펭귄들이 행복하게 모여서 살고 있다. 단, 우리의 주인공만 빼고!

  '나 행복한 펭귄 아니야. 나 추위에 약해. 너무 춥다고.'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요'라고 말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마음과 현실은 천지차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펭귄은 펭귄이면서 당당하게 추위에 약하다고,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자신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판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자세, 솔직한 표현력까지 이 주인공 뭔가 큰일을 할 것 같다.

  '오올! 좀 멋진데!' 나의 기대가 슬슬 부풀어 오른다.

  게다가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못마땅해하고 투덜거리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꾸는 것을 찾아 과감하게 무리에서 벗어나 길을 나서는 용기와 행동력까지 겸비했다.

  '여기를 벗어나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아마도 상상도 못 할 만큼 멋진 게 분명히 있을 거야.'

   우리의 주인공이 생각하는 것만큼 내 마음속 기대도 점점 커져간다.

   '그래, 용감하고 씩씩한 주인공에게 걸맞은 대단한 무언가가 나타날 거야!'


  타고 가던 빙하가 점점 녹아서 없어지기 직전에 드디어 펭귄 앞에 꿈꾸던 것이 나타난다.

  '이거 꿈은 아니겠지? 저기 좀 봐! 내가 그토록 원했던, 언제나 꿈꿨던 바로...'

  펭귄이 간절히 원하고 꿈꿨던 것은 무엇일까?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늘 무표정하던 펭귄의 눈까지 살짝 반달로 오므라들 정도일까? 덩달아 나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이르며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것은 바로~ 바로~ 바로~(복면가왕 프로그램의 진행자 버전으로 읽으면 더 실감 나는 상황^^;)


  '엥?'


  펭귄이 마침내 발견한 것은 바로 뜨개질로 만든 티팟 덮개였다.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 동안 빨리 식지 않도록 차 주전자에 씌우는 덮개 말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둥그런 차 모양에 알맞은 덮개를 만들려면 대바늘로 만드는 털모자 뜨개질 방법을 응용하면 유용하다고 한다. 헛!


  요리조리 티팟 덮개를 살펴보고 좋아라 하는 펭귄과 달리 나는 살짝 아니 그보다는 좀 많이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뭐야? 고작 티팟 덮개 하나 가지고 저렇게나 좋아한다고? 아무리 그림책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시시하잖아.'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모처럼 설레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스스슥 땅으로 내려앉아 축 늘어지는 기분이다.

  '이러니 그림책을 애기들이나 보는 것 아니냐고 다들 뭐라 하잖아.'

  혼자서 입을 삐쭉거린다. 물론 티팟 덮개를 보고 추위를 많이 타는 펭귄이 모자로 사용한다는 다소 창의적이고 유머러스한 발상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결말이 시시하단 생각을 바꾸기엔 역부족인 것 같다.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맨 것이, 그토록 원하고 꿈꾸던 것이 겨우 티팟 덮개라니.... 게다가 함께 길동무가 되어주었던 갈매기가 가리킨 곳에는 야자수가 있는 섬이 버젓이 있는데도 말이다. 야자수가 있다는 것은 펭귄이 살던 추운 얼음나라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곳 아닌가?

  그런데 주인공 펭귄은 오렌지 색 티팟 덮개(개인적으로 색감은 마음에 들지만^^;) 하나를 당당히 머리에 쓰고는 다시 자신이 살던 어마어마하게 시린 하늘 아래 멀고 먼 눈과 얼음의 땅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펭귄 무리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 혼자서 지그시 눈을 감고 편안하게 있다.


 '너는 정말 이 정도로 만족하니? 고작 이걸로 괜찮은 거야?'     

 오렌지 색 발랄한 티팟 덮개 모자를 쓰고 평안해 보이는 펭귄을 한참 바라보면서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엄청나고 대단한 그  무엇이 아니다.


 어떤 직장인은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로또 한 장으로 일주일 치의 고단함을 견디는 힘을 받는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불금의 치맥과 주말의 늦잠으로 삶의 낙을 삼는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세상의 그 어떤 환대보다 기쁘게 반겨주는 댕댕이로 하루의 피곤함을 날린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다니는 봉사활동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또 어떤 이는 화, 목요일 저녁 배드민턴 동호회에 다니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드라마 대사 하나로 울고 웃을 때, 그냥 내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는 친구의 목소리에 마음이 따뜻해질 때, 무심코 바라본 하늘이 너무 파랄 때, 동네를 거닐다 들어간 카페에서 진짜로 맛있는 커피를 마실 때, 게다가 예전에 엄청 좋아하던 노래까지 흘러나올 때, 마음에 쏙 드는 그림책을 발견하고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을 때, 엄마가 이것저것 싸준 반찬을 꺼내어 맛나게 먹을 때,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장바구니에 보관된 옷을 결재하고, 며칠을 기다려 드디어 택배가 왔다는 문자를 받고 신나게 퇴근해서 입어봤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어울릴 때, 일찍 퇴근한 날 햇빛 아래 반짝이는 벚꽃을 바라볼 때, 바람 솔솔 부는 저녁 배부르게 밥을 먹고 당신과 나란히 골목을 산책할 때, 보고 싶은 전시회를 직접 가 보게 되었을 때, 1박 2일 짧은 여행 계획을 짤 때, 내가 쓴 글이 마음에 들 때, 자꾸만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오를 때....


  물론 로또 일등이 되면, 누구처럼 일찍 사둔 집값이 억 단위로 오르면, 경치 좋은 곳에서 돈 걱정 없이 한 달 살기든 일 년 살기든 할 수 있으면, 좋은 계절에 해외여행도 마음껏 다니면, 금수저로 태어나 여유 있는 백수로 산다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가지지 못한 이들의 자기 합리화 혹은 정신 승리라고 누군가가 냉정하게 말한다면 뭐 딱히 반박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내 상황이 대단하지 않다고 해서 내 삶이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나도 당신도 주어진 삶을 버티고 살아가는 존재, 이왕이면 자신만의 사소한 방식으로 씩씩하고 즐겁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행복하고 건강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 아닌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크기보다 빈도수가 더 중요하다는 걸 나도 당신도 이미 잘 알고 있다. 


  사소한 내 방식으로 자주자주 나를 토닥토닥해 주고 내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을 나누어준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그 사소함들이 결국엔 나와 당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 믿는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 황동규 <즐거운 편지>중에서


<덧붙이는 글>

1. 결국 티팟 덮개로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주인공 펭귄은 이제 더워서 큰일 났다고 외친다. 그런 펭귄을 고래가 미소 지으며 바라본다. 나는 그 고래의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사소한 발견으로 현실을 이겨냈던 펭귄은 또 다른 사소함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사소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를 지탱하는 사소함을 더 많이 만드는 사람이 현명하고 행복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사소함을 더 많이 발견해야겠다.


2. 요즘 나는 작년에 썼던 오늘자 일기 보는 재미에 빠졌다. 앱에 큰 의미 두지 않고 써두었던 일기가 아침마다 추억여행하라며 일 년 전 오늘 날짜의 일기를 띄어준다.  일 년 저 내가 오늘의 나에게 선물해 주는 느낌이다. 아! 이런 걸 보고 좋아했구나. 이맘땐 많이 힘들었구나. 당신과 여기에 놀러 갔었구나. 이런 시시콜콜한 일상이 더해져 오늘의 내가 있구나... 나를 살게 하는구나... 오늘도 사소한 일상을 잘 살아봐야지 나는 사소하게 잘 살고 있다. 하핫!


3. 그림책 <추위를 많이 타는 펭귄>은 휴 루이스 존스가 쓰고, 벤 샌더스가 그리고, 엄희정이 옮겼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멈춤을 진심으로 축하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