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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바스 Jun 20. 2021

사활을 걸었습니다 #02

나는 왜사활을 걸어야 하나요?

웹소설 오디오 드라마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면 분명 매일 야근은 필수 조건이다. 운명이다. 작가 섭외, 시나리오 각색, 연출 기획, 캐스팅, 일정 조율, 녹음, 편집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편집에 투입되는 시간이 가장 길어질 것이다. 일반 독자의 시점으로 읽을 때와 제작을 염두하며 읽을 때는 확연한 차이가 크다. 집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웹소설을 띄워놓고 손가락으로 넘기며 읽는 것이 아니다. 이건 일이다. 어떤 부분을 요약하고, 각색하며 수많은 등장인물의 배역을 구분하여 성우들에게 배정하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 제작되던 웹소설 오디오 드라마와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깐깐한 담당자님이 강조한 다양한 포인트를 다 살려내고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작품의 퀄리티여야 한다. 


그런데 마감 일정은 왜 그렇게 촉박하게 던져주는지 생각할수록 얄미웠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지만 회사의 계속되는 야근 눈치와 이런저런 처우에 화가 많이 났던 나는 이 무거운 짐을 혼자 감당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다. 혼자 하는 것보다 담당자를 한 명 더 붙여 같이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경험상 호흡만 잘 맞는다면 몇 배 이상의 시너지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연출, 편집 스타일이 나와 동일해야 한다. 제작 스타일에 있어서 나와 크게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작품의 색과 검수과정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걸 누구와 같이 할 수 있을까?


나에게 부사수 한 명 있다. 나를 전적으로 믿고 따라주는 후배 녀석으로 점심, 커피, 산책, 업무 파트너로 회사생활의 모든 부분을 함께한다. 성격은 다르지만 나름 내 장단에 잘 맞춰주는 후배 녀석이다. 종종 깜빡하고 반복적인 실수를 많이 하지만 아끼는 후배인 만큼 업무의 많은 부분을 믿고 맡기고 있었다.


팀장님께 고민했던 내용을 먼저 말씀드렸다.

"팀장님, 이번 프로젝트는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서 같이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에? 둘이서 어떻게 해? 누구랑?"

"OO랑 같이하면 호흡도 잘 맞고, 마감 일정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둘이서 한 프로젝트를 하면 이슈가 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괜찮겠어?"

"그럼요! 그래도 절 잘 믿고 따라주는 친구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돼요"


팀장님도 이야기를 듣더니 흔쾌히 오케이 해주셨다. 하지만 회사는 전부 반기를 들고 안된다는 의견을 펼쳤다. 다행히도 팀장님께서 잘 몸빵 해주신 덕에 이번 프로젝트를 후배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후배에게도 같이 프로젝트에 하자고 제안하니 거리낌 없이 바로 "오!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그래도 큰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것에 후배는 크게 좋아했다. 나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듯한 마음에 부담이 싹 날아갔다팀장님께 말씀드려 후배가 담당하던 업무 일정을 조율했다. 그렇게 후배와 함께 오디오 드라마 제작하는 배에 올랐다


깐깐한 담당자님께는 요청받았던 마감 일정보다 야근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일정을 전달드렸다. 다행히 전달드렸던 일정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잘 논의되었다. 이제 스스로에게 사활을 걸 도록 긍정적 마인드 컨트롤을 할 차례였다. 이번 프로젝트의 장점을 노트북 노트에 기록해봤다.

 

1) 지금까지 투자했던 예산중에서도 가장 큰 타이틀이다. 

2) 사극 웹소설로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님으로 유명한 웹소설이다. 

3) 같이 작업할 후배는 나름 센스도 좋고 나를 잘 믿고 따라준다.

4) 기획과 제작의 전반적인 업무 총괄을 담당하여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


그렇게 반 억지로 사활을 걸 준비를 했다. 같이 작업하는 후배에게도 이런 상황을 잘 얘기해줬다. 결과가 어떻든 열심히 믿고 하겠다는 후배 덕에 없던 의지도 생겨났다. 이제 작품을 읽고 극본 작가님과 대본 각색 논의, 캐스팅, 연출 포인트, 효과음 정리, 녹음 일정 조율 등 제작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 가장 먼저 캐스팅 라인업과 관련하여 깐깐한 담당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먼저 캐스팅 라인업 구성해서 **일 까지 주세요. 주연급은 2~3명 이상으로 추천해 주시고요. 구성해 주신 라인업 보고 피드백드리겠습니다", "효과음은 어디서 사용하시나요?", "음악은 어떤 스타일로 사용하세요? 미리 들어볼 수 있을까요?", "대본 중 1화의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리고 이것도요, 저것도요. 다시 부탁드려요" 등등 사활을 건 담당자님의 폭풍 피드백이 시작됐다.


캐스팅 라인업 구성을 달라는 이야기는 총 132화의 작품을 정확하고 빠르게 다 읽고 등장인물 배역을 정리한 뒤 성우 캐스팅 명단을 샘플 음원과 정리해서 달라는 이야기였다. 이 피드백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나 또한 사활을 걸어야 했다. 


깐깐한 담당자보다 더 잘 알아야 했다. 깐깐한 담당자님의 자주 던지는 스토리와 관련된 피드백을 작품에 반영하되 서사의 흐름은 해치지 않고 좋은 퀄리티를 만들어 내야 했다.


'깐깐한 담당자가 놀라서 넘어질 정도로 작품을 만들자! 지금껏 최고의 오디오 드라마로 알려진 타이틀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자'라는 마음 가짐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렇게 구성한 최고의 성우 라인업과 오디오 드라마 각색의 최고 실력자 작가님을 섭외했다. 작가님은 함께 내부에서 작업하고 있었고 제법 손발이 잘 맞았다. 무엇보다 백 프로 믿고 맡길 수 있는 오디오 대본화의 실력자였다. 분량 조절, 장면 전환에 있어서 재치와 센스를 잘 담아 주었고 중요한 장면과 인물들의 대사를 현대 구어체로 잘 살려주었다. 

 

연출 효과에 있어서는 큰 공을 들였다. 직접 역사박물관에 다녀오며 당시 사용하던 서책, 왕좌, 의자, 대청마루 등 꼼꼼히 살펴봤다. 미리 효과음 믹싱 작업까지 하여 기본 사극 효과음 툴을 만들었다. 드디어 프롤로그와 1화가 완성됐다. 프롤로그와 1화를 만드는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고작 20분 내외 분량이었지만 후배와 동일한 편집 스타일을 맞추고 사극에 사용되는 효과음, 음악 작업에 크게 신경 쓰다 보니 작업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작품은 깐깐한 담당자님의 마음도 감동시켰다. 지금껏 들어본 작품 중 가장 퀄리티가 좋다며 피드백을 주셨고 관련 부서의 모든 참조가 들어가 있는 메일에 특별히 칭찬까지 해주셨다.


깐깐한 담당자님의 3페이지에 달하던 피드백이 점점 줄었다. 두 페이지, 한 페이지, 몇 줄 단계로 계속 줄었다. 결국 수정사항이 없다는 메일까지 받았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어 감사했지만 잃은 것도 상당했다. 집안에 소홀해지고 주변 친구들과의 관계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하지만 대가가 너무 컸다. 


귀에서는 종종 "삐~ 삐~"거리며 이명도 생겨났다. 몸도, 정신도 바쳐서 만든 작품이지만 작품에 이름조차 남길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만족감은 있었지만 허무함도 같이 찾아왔다. 건강까지 잃어가니 '이렇게 할 거면 요령 피우며 정도껏 할걸 그랬나?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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